취향, 독립
(다시 쓴 서문)
어릴 적 그 아이는 특별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 파란색을 지닌 아이였다.
아이는 세상을 무대 삼아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연한 하늘색이 되었다.
어느 날 아이는 회사에 들어갔다.
사회라는 세탁기에 돌려진 아이는 점점 색깔을 잃어갔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린 아이는 말쑥한 회색 신사가 되어있었다.
아이는 결국 창백하게 질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회색 신사였다.
이 아이의 불안감을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종종 마주치곤 한다. 삶의 주인공이었던 시절은 어느새 잊히고 색깔 있는 사람을 흠모하는 평범한 회색 인간이 되어버린다. 도대체 우리의 취향은 누구에게 도둑맞은 걸까? 다들 가지고 있던 파랗고 하얗고 빨갛던 색감들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내게는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가 두 명 있는데 바로 미하엘 엔데의 동화에 나오는 소녀 모모와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소년 모모다. 엔데의 모모는 시간을 허망하게 빼앗기는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회색 신사들과 맞서 싸우는 용감한 소녀의 모험 이야기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마치 우리들의 모습을 투영이라도 한 듯 시간을 아끼고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모모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회색 신사를 쫒아 버린다.
로맹 가리의 모모는 사회와 부모에게 버림받은 작은 소년이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내용이다. 이미 너무 조숙한 모모는 냉소적으로 사회를 읊조리기도 하고 때로는 어린아이의 철없는 모습을 교차로 보여주며 웃음을 자아낸다. 비록 사회는 그들을 버렸지만 할머니와 모모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돌보고 지켜주며 사회의 시선에 맞서 나아간다.
사회와 맞서 투쟁하는 작은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현실에서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네의 모습과 닮아있어 더욱 응원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글의 시작부터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먼저 소개한 이유는 아직도 내가 어른인지 어린 어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서이다. 몸은 이미 다 성장하여 노화되어 가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세상에서 독립하지 못한 채 힘겹게 싸워가고 있다는 느낌에 종종 두려움을 느끼는데 항상 이 아이들의 이야기에서 힘을 얻고는 한다.
그런 두려움이 가장 강했던 시기는 사회생활의 첫 경험을 열어준 스타트업을 다니던 때였다. 스타트업이라는 로켓에 올라타 신분 상승을 해보겠다는 간사한 마음도 있었고 어중간한 경력을 쌓는 것보다 폭넓은 경험을 쌓는 게 좋겠다는 빛깔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그 당시 나는 통신요금도 밀려 있었고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아는 선배의 집에서 신세를 질 때였다. 남들에게는 비장한 각오로 내 꿈을 찾아 스타트업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아마도 나는 매달 돌아오는 생활 부채를 염려하는 취업 준비생의 시절이 너무나 지쳐버려서일지도 모르겠다.
스타트업 노동자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고 월급은 겸손하여 월세와 식비를 내며 근근이 살아가는 수준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일에 매달렸다. 이 로켓을 얼른 가열시켜 날아올라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매일 반복되는 번아웃과 시간의 가난함에 삶은 메말라갔다. 주말은 평일보다 조금 더 느슨하게 일하는 시간이었고 문화생활이나 취미 생활은 너무도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방에는 플라스틱 편의점 도시락이 쌓여가고 생필품은 균일가 마켓에서 찍어낸 것으로 가득했다.
어느 날 내가 너무 색깔이 없이 살아가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취향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 모습이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인지 누군가가 강요한 선택의 결과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다니고 있던 회사의 대표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창업 아이템이 있는데 제 일을 하는 게 더 보람이 있고 후회가 없을 것 같아 퇴사하겠습니다. (사실 2년간 오르지 않은 월급에 빡쳐서 창업을 준비함) 사족이지만 다음 달에 월급을 60%나 올려주셔서 1년을 더 다녔다. (60%??)
독립 선언의 날 이후로 나는 자체적으로 야근을 없앴다. 사람들을 만나고 모임에 참가하고 기타를 배우고 책을 읽으며 생활의 여유를 억지로 늘려갔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문화적 여유를 마음껏 즐기며 한풀이를 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모았던 돈은 문화적 경험에 소비되어 금세 휘발되어갔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상태에서 일 이백 더 가지고 있는다고 내가 뭐라도 될게 아니었고 또 딱히 없다고 생활이 나락으로 떨어질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당장의 삶은 충만했던 시기였다.
불행했던 시기에 나는 문화를 상품으로 여겨 일일이 돈의 가치를 부여했다. 나의 선택은 모두 비용 덩어리였고 선택 하나하나가 나를 더 가난하게 만들 거라는 불안감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는 떠밀리고 떠밀려 문화적 양식이 현저하게 결여된 가성비를 고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취향은 자본주의에 잠식되어있었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나오는 어리석은 어른들을 그렇게 경멸하고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그 모습을 하고 있는 걸 깨닫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취향에 대해 생각했다. 취향이란 무엇일까 취향은 타고나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강요받는 것일까 나의 취향은 무엇에 영향을 받았을까 이런 고민을 시작으로 취향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취향에 대해 파고들다 보니 우연히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매력적인 학자를 만나게 된다. 취향은 고귀한 안목과 타고난 미의식의 공통 감각이라고 말하는 칸트와는 달리 부르디외는 취향을 사회가 만들어낸 계급적 구별 짓기라고 말한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쌓은 사회적 시스템이 한정된 취향만을 소비할 수 있도록 계급의 층을 만들어내고 그 계층 안에서 우리의 취향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벼락같은 한마디였다. 모든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불공평한 세상에게 투쟁할 수 있는 무기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부르디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명성을 남긴 학자다. 하지만 그의 역사는 차별과 구별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작은 시골 마을의 학생이었다. 지금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며 오랫동안 답을 찾아 헤 메인 부르디외는 남들이 보기에는 루저였고 어쩌다 성공한 근본 없는 지식인이었지만 결국 적극적인 참여와 성찰로 취향의 독립을 이룬다. 서민의 편에서 취향의 자유를 외치던 프랑스의 학자 부르디외가 남긴 유산들을 주로 참고하여 글의 내용을 구성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 장 보드리야르의 사유가 우정 출연할 예정이다.
이 책을 통해 취향에 대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취향이 그래서 뭔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취향은 어떻게 작동하는데?, 그래서 지금 취향이 왜 중요한데?
지금 쓰이는 이 글은 사회학의 어려운 이론을 쉽게 알려주기 위해서 쓰는 글이 아니다. 부르디외가 성공한 것처럼 격차를 뛰어넘는 계급 상승의 비법을 알려주는 게 목적이 아니며 그렇다고 이 모든 불공평함이 비도덕적 상류 계층이 만든 사회 시스템이 문제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쓰는 글 또한 아니다. 단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의 민낯을 나누며 "괜찮아 모든 게 너의 잘못만은 아니야"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시대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우리에게는 취향의 독립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