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을 읽고
성큼 왔던 단풍이 어느새 하나둘 떨어지며 벌써 가을이 저물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가을 산책을 즐기는 두어 시간 동안 정신없이 읽어버린 책 한 권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개인의 위대한 독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요.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또 몇 번은 독립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옵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가족의 그늘에 너무 오래 머물게 된 사람도 있고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 이직이나 독립의 시기를 놓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관계에 오래 묶여있다 보면 우리는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이 강해져 정작 나보다 소속된 곳을 더 우선시하게 됩니다. 나를 위한 선택을 망설일수록 나의 존재감이 점점 옅어지게 되는데요. 이 상황을 자각하고 나의 삶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보지만, 막상 독립 이후의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이 결국 나의 독립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는데요.
오늘은 우리의 독립을 응원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는 책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사실 이 책을 여러 번 소개받았는데요. 다른 책들을 읽느냐 계속 읽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책이 아무리 감명 깊어도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추천은 안 하잖아요? 그런데 이 책을 추천해 주신 분은 저에게 세 번이나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그래! 이 책은 무언가 있구나! 꼭 읽어보자 마음을 먹고 드디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첫 목차인 <우리의 정류장> 부분을 읽자마자 책의 문장들이 저를 휘감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책은 내가 오늘 안에 다 읽어버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편 지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요. 저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여운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제목이 너무 서정적이라 재미있는 책은 아니겠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마치 나의 세대의 이야기가 아닐 것 다는 느낌도 들었던 것 같아요. 제목에 나오는 필사라는 취미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쓰는 말은 아니니까요. 단순히 예술적으로 멋을 부린 글이겠다는 편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실수를 할 뻔했던 영화가 있는데요. 바로 이창동 감독의 시라는 영화입니다.
제목에서 아무런 자극을 느끼지 못해 오랫동안 이 영화를 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작년 독서 토론모임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아, 내가 제목 때문에 이 좋은 영화를 놓칠뻔 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제목은 문제가 없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함축적인 의미를 잘 담은 제목이었어요. 물론 책을 다 읽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는 게 문제인 거죠. 직관적인 제목을 가진 작품이 아니라면 좋은 서평과 예고편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영화를 한 편 봐도 우리는 제목만 보지 않고 예고편이나 평론가의 평을 찾아보잖아요. 저의 이 리뷰가 좋은 예고편이 되어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독자들과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정류장>
자 이제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책의 첫 장은 “계절이 변하는 걸 절감할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라는 문장과 함께 연인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테이블이 세 개 뿐인 작은 카페로 시점이 옮겨오는데요. 오랜만에 다시 재회한 두 연인이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글을 읽다 보면 헤어지고 나서 수년이 지난 두 사람인데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묘사되는 그 장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감정선의 표현이 좋은데요. 아래의 발췌를 통해 그 장면을 잠시 음미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몇 번의 봄을, 몇 번의 여름과 가을과 몇 번의 겨울을 보낸 뒤에 나는 그 사람과 헤어졌다.
누구 때문이라고, 무엇 때문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헤어진 이유를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 때문인 것 같았고 나 때문인 듯도 싶었다. 그래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대로네요.”
그 사람의 시선은 내 입술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변할 게 뭐 있겠어.”
거짓말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 살이었고 그 사람은 스물네 살이었다. 나는 이제 미혹되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흰머리가 이상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머릿결은 여전히 풍성했고 주름 없는 기다란 목은 매끈했다. 변한 게 있다면 눈빛이 더욱 깊숙해 아늑하고 고요해 보였다.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미리 마음의 준비도 했었는데. 나와줘서 고마워요.”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어.”
손님이라곤 그 사람과 나밖에 없는, 테이블이 세 개뿐인 작은 카페였다. 원두를 직접 볶았는지 희미하게 탄내가 맡아졌다. 음악 소리가 작게 흘렀다. 그 사람이 작은 상자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건 계획에 없던 장면이었다. 제발, 그러지 마.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 사람은 상자를 열어 반지를 꺼냈다.
“내 마음은 그대로예요.”
“내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예전으로 돌아가긴 힘들어. 이미 알고 있잖아.”
그 사람과 헤어질 때 나눈 대화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이전대로라면 이제 그 사람은 반지를 다시 상자에 넣고 그 상자를 거둘 것이다.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겠지, 그럼 나도 미안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색한 침묵을 힘겹게 참아내다 누군가 먼저 일어서고, 그렇게 연락이 끊기고, 그 사람과 나는 다시 헤어진 사람들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사람이 반지를 거두지 않았다.
“그럼 왜 나왔어요. 사람 헷갈리게, 왜.”
“한 번쯤은 보고 싶었어.”
“한 번쯤?”
나는 그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 번쯤만 보고 싶었을 리가. 밤낮으로, 무시로 떠오르고 떠올리던 그 사람이지 않았나. 그러나 나는 애써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그사이 어떤 식으로든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어.”
카페로 손님이 들어왔고, 그 사람은 조용히 일어났다.
“그 마음이나 바뀌면 연락 줘요. 난 계속 그대로 있을 테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그 사람이 카페를 나섰다. 나는 차마 그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볼 수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반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반지를 조용히 손가락에 껴봤다. 왼손 약지에 너무 딱 들어맞아서, 반지가 너무 밋밋해서, 창밖의 그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아서 너무 서글펐다.
이 장면을 읽고 제가 좋아하는 영화가 떠올랐는데요. 바로 <더테이블>이라는 영화입니다. 정유미, 한예리, 임수정 배우가 나오는 영화인데요.
하나의 카페를 배경으로 네 개의 단편이 어우러지는 영화입니다. 주로 옛 연인들의 재회를 다루고 있는데요. 씁쓸한데 반갑고 반가운데 외롭고 외로운데 애틋한 느낌이 영화 전반에 녹아있습니다. 카페 안에서 조곤조곤 이루어지는 두 주인공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는 느낌이 들어 괜스레 숨죽이고 귀를 기울이게 되는데요. 바로 이 책의 도입부가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헤어지고 몇 년 만에 만났지만 남자는 주인공에게 다시 그날의 반지를 꺼내놓습니다. 주인공은 다시 만날 수 없다며 거절하는데요. 결국 남자는 마음이 바뀌면 다시 알려달라며 반지는 자리에 두고 떠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반지를 조심스럽게 끼워보며 슬퍼합니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은 아직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데요.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어떤 사정에 대한 궁금함을 품고 다음 이야기를 계속 읽게 됩니다.
<목련빌라>
도입부에서 연인인 남자 친구를 밀어냈던 주인공의 이야기는 목련빌라에서 다시 이어지기 시작합니다. 40년도 더 된 목련이 지키고 있는 이 목련빌라에 주인공의 가족이 30년 전에 이사를 와 지금까지도 살고 있습니다. 사업에 망하고 나서 일용직 일을 하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실패에도 집안을 억세게 꾸려온 어머니 집안의 기대와 사랑을 받으며 열심히 노력해 보통의 삶을 추구하는 여동생 그리고 뒤늦게 시인의 꿈을 품고 등단을 위해 시를 쓰지만, 직장이 없어 집안일을 떠맡은 장녀가 이 목련빌라 가족의 구성입니다.
집 안의 장녀인 그녀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장래 희망란에 없음이라고 적을 정도로 특별히 좋아하거나 하고 싶은 일이 없는 무난한 사람입니다. 흥미가 없어 대학에도 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권유로 준비한 공무원 공부마저도 그만둡니다. 그녀는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결국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은 시를 쓰는 것이라고 결심하는데요. 그녀는 매일매일 필사를 하고 시를 쓰며 등단을 위해 노력합니다. 반대로 동생은 명석하고 사회적인 사람입니다. 공부도 곧잘 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대학에도 갑니다. 결국 원하는 기업에 취직도 하고 결혼을 하여 두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꽤 평범한 삶인데요. 많은 사람의 욕망이 그러하듯 평범한 삶이 곧 성공한 삶이라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모는 멀쩡한 삶에 가까운 동생에게 전폭적인 지원과 애정을 아끼지 않는데요. 아마도 그녀만큼은 목련빌라를 벗어나 번듯한 삶을 사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없는 아이였을까. 넉넉하지 않은 집의 장녀로 자랐으면 다른 세상으로 나가려는 욕망을 품었음 직도 한데, 그도 아니면 답답한 집을 떠나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을 법도 한데, 나는 그저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는 아이일 뿐이었다. 변화나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았고, 몸을 움직이는 놀이도 즐겨하지 않았다. 집에 있던 많지 않은 책을 읽고 또 읽거나, 다 쓴 달력 뒷장에 빼곡하게 낙서를 하거나, 반듯하게 낙서를 하거나, 반듯하게 누워 천장의 벽지 무늬를 눈으로 따라가며 상상하거나, 그도 아니면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게으르다고 표현했고, 동생은 꿍꿍이가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놀렸다. 아버지만이 세심한 성격이라고 말해주었다.”
“대신 동생은 똑똑하고 야무졌다. 기대는 동생에게 집중되었다. 부모의 기대를 받지 않은 나는 어떤 삶을 살든 부모에게 평가받지 않았다. 잘하라는 북돋움도, 못한다는 질책도 받지 않았다. 무엇이 되라는 강요도 없었지만 무엇이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도 상관이 없었다. 아무여도 상관이 없었다. 동생은 나와 많이 달랐다. 전교 상위권을 유지하기 위해 늘 쉬지 않고 공부하는 아이였다. 없는 살림에 지속적으로 학원도 다녔다. 부모에게 동생은 기꺼운 투자 대상이었다. 힘겨운 하루의 값진 의미가 되었고, 고단한 노동의 보상이자 벌이의 가치를 심어준 자식이었다.
그런데 집안에서 가장 기대가 컸던 동생이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목련빌라로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주인공에게 위기가 찾아오는데요. 똑 부러진 동생이지만 결혼 생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동생을 우연히 목격한 주인공이 그 꼴을 참지 못하고 동생과 동생의 아이들을 데리고 본가로 들어옵니다. 동생은 불행한 과거를 외면하기 위해 생활비를 번다는 명목으로 회사에 계속 나갑니다. 집안의 식구가 늘어나는 것이 부담되었는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아직 취업하지 않은 우리의 주인공 장녀가 동생의 두 아이를 돌봐야 했고 자연스럽게 집안 살림까지 모두 도맡아야 했습니다. 30대 후반에 겨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주인공은 매일 필사를 하고 시를 쓰며 삶을 가꾸고 있었지만 아르바이트 말고는 변변한 직장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가족의 짐이 뚝 떨어진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두 아이를 건사하며 가족의 삶을 지키는 일에 투신합니다.
<치우친 슬픔이 고개를 들면>
어느 날 가족은 동생이 연애하는 것을 눈치챕니다. 화장도 더 오래 하고 귀가 시간도 점점 늦어지고 있었는데요. 모처럼 쉬는 날 어머니는 주인공과 아버지를 불러 동생의 연애와 관련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합니다. 막내딸이 만나는 사람도 생겼으니 이참에 독립 시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인데요. 동생의 두 아이는 그녀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데 문제가 될 테니 자기들이 보살피자는 얘기입니다. 나이도 많은 당신이 어떻게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겠냐고 묻자 어머니는 주인공을 돌아보며 넌지시 말합니다. “너 있잖아”
어머니는 첫째 딸인 주인공의 삶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등을 떠밉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희생하는 게 동생과 가족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가족이 정성 들여 자신을 설득했다면 “그래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라고 하면서 동생의 아이들을 맡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심한 어머니의 태도에 그녀는 망연자실합니다. 가족은 공동 희생 구조였고 누군가는 결국 그 희생의 중심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끝도 없는 집안일에 지쳐있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합니다. 아이들의 빨래는 어찌나 많은지 하루에 두 번씩 세탁기를 돌려야 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책의 내용을 인용합니다.
“가장 힘든 일은 역시 부엌일입니다. 매일 세끼를 차리고 치우는 일, 그 반복적인 일이 끝나지 않는 소모품으로 전락되는 기분이 들게 했다. 매 끼니 새로운 반찬과 국과 찌개를 끓이는 게 아니어도 상을 닦고 수저를 놓고 음식을 차리고 빈그릇을 치우고 설거지하고 남은 음식을 갈무리하고 다시 다음 끼니 준비를 해놓고서야 부엌을 나올 수 있다는 것. 매일매일 거르지 못하는 일인 데다 거를 수도 없는 일의 무한 반복이었다. 끔찍하게 지겹고 지긋지긋하게 지루했다.”
그나마 그녀를 위로했던 필사의 밤과 시를 쓰는 시간은 더는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점점 자신의 영혼이 텅 비어버리는 걸 느끼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녀의 책임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무를 받아들이고 가족의 중심으로 들어가던지 온전히 나만의 삶을 살기 위한 독립을 선택하고 가족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결국 가족에게 선언합니다.
“나, 집을 나가고 싶어.”
엄마와 동생은 잘못 들은 사람처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고 싶어.”
그녀의 독립 선언은 큰 충격이 되어 이 가족을 뒤흔듭니다. 이후 상황은 여러분도 예상하시는 것처럼 큰 파문이 일어납니다. 어머니는 절대 보낼 수 없다며 난리를 쳤고 동생도 아이들은 어떻게 하냐고 물어옵니다. 과연 그녀는 무사히 독립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계속 시를 써서 등단할 수 있을까요? 아직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는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꼭 확인해보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주인공이 가족을 향해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나 집을 나가고 싶어."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녀뿐만 아니라 저도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지금까지 읽어왔던 답답함이 한순간에 해소되며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에 감정을 몰입하여 읽을 수 있던 이유는 사실 저도 주인공과 같은 시점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제가 대학생일 때 당시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집안의 장남으로서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낑낑거렸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책임감은 우울한 감정으로 돌아왔고 그렇다 보니 학교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독립을 마음먹고 이런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내가 가족을 떠나고 난 후 남겨진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면 나의 책임이지 않을까?”, “나는 앞으로 누구 집에서 머물고 생활비는 어찌해야 하지?” 그런데 지급 독립하지 않으면 저는 결국 제자리 서서 나중에 더 큰 후회를 할 것 같았습니다. 당시 가족의 문제들은 제가 머리를 싸맨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도 아니었고요. 결국 전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 이후로 10년이 지난 세월 동안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가족은 가장 친밀한 타인이 되어있었고 자주 보지 않지만, 전보다 더 살갑고 애틋합니다.
후회가 남는 선택을 할까 봐 우리는 고민을 많이 하죠. 하지만 후회는 오히려 선택하지 않을 때 더 많이 오는 것 같습니다. 모든 독립이 아름답고 찬란한 성장을 담보하지는 않지만, 독립은 오직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책을 통해 독립을 고민하는 많은 사람이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나와 당신의 독립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