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은퇴했다
엄마가 은퇴하고 일 년이 지났다. 엄마는 갑자기 하루가 너무 길어졌다고 했다, 젊은 사람들처럼. 내가 걸음마를 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에 작은 점포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고, 30년이 넘도록 운영했다. 해가 뜨면 일어나 밥을 먹고 간단한 집안일을 한 다음 가게에 나가 캄캄한 밤이 되면 돌아오는 일상이 깨지자 엄마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다. 부쩍 짜증이 는 엄마에게 나는 그동안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했으니 관에서 운영하는 무료 강좌를 들어볼 것을 추천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며 뾰로통한 반응을 보이더니 이내 여기저기 전화를 했고, 노래교실과 컴퓨터 활용교실, 건강체조교실 등에 나가며 시간을 때웠다.
그 무렵의 엄마는 장사 경력을 살려 무엇이든 하고자 했다. 복지회관에 아르바이트 거리가 있는지 알아보는 듯했다. 평생 해온 일이니 뜨개질이나 라크라메 공예, 자수를 가르치는 걸 가볍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젊은 선생님이었고, 엄마의 나이는 그들의 허용 범위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현실과 이상의 갭을 깨달은 엄마는 재능기부 형태로 일자리를 만들어갈 거라고 했었다. 엄마의 이 부지런하고도 열정적인 DNA는 대체 내게 물리지 않은 걸까,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출가했으니 나는 엄마와 함께 산 날들보다 혼자 살아온 세월이 훨씬 길다. 젊어서는 밖이 너무 재미있어 집이 불편했다. 시골집에 가면 느지막이 일어나 눈곱을 떼기가 무섭게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고 새벽녘에야 돌아오곤 했다. 그때 내게 집은 여관 같았다.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만 집에 들렀고 한 번에 이틀 이상 머물지 않았었다. 엄마가 백수로 생활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나는 어쩔 수 없이 시골집에서 한 달을 머물러야 할 일이 생겼다. 2년마다 찾아오는 전세 재계약 시즌이었다. 정북향이라 5층임에도 채광이 좋지 않았던 집을 6년 만에 떠나기로 결심한 거다. 마음에 드는 전셋집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어렵사리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으나 이사 날짜에 한 달 간의 공백이 있었다. 두 번의 이사 비용을 치르더라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제주행을 택했었다. 올레길이 생기기 시작하던 때였는데, 그때 섬 살이가 질렸던 것 같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길의 끝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이 좋아 제주로 향했지만 밤마다 규칙적으로 들리던 파도소리가 나중에는 사람의 숨소리만큼이나 처연하게 들렸다. 그래서 엄마에게 돌아가기로 한 거다.
본디 늙은 엄마와 과년한 딸의 대화란 어떤 방향에서 시작하든 종착지는 정해져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시집가. 하지만 엄마의 은퇴가 가져온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평소 3일을 함께 하기 어려웠던 모녀 사이가 모녀 사이가 유래 없이 다정해졌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차려 놓은 아침 밥상을 성의껏 받으면 됐고, 엄마가 복지회관에서 교양을 쌓는 동안 청소만 해두면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엄마 주변에는 시집간 딸과 마음 같지 않은 며느리들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복합적인 이유로 엄마의 잔소리는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가을 무렵이었다. 복지회관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다시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가깝게 강가 산책, 멀리는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절까지. 그날은 수타사에 다녀왔다. 절집 앞 연못에는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연잎이 푸르렀다. 그 사이를 지나 절로 들어서는 엄마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장사를 하면서 맺은 인연이 버겁다고 고백했다. 비교적 살림살이가 넉넉한 이들이 주 고객이었는데, 막상 당신의 벌이가 사라지자 그들 수준에 맞춰 생활하기가 꽤나 부담됐던 모양이다. 은퇴 후 엄마의 삶은 그러했다. 풍족한 아줌마들과 어울리기엔 마음이 너무 가난했고, 복지회관에 나가기엔 심리적으로 너무 젊었다. 나는 그 이유를 자신을 돌보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