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하노이_01

엄마가 은퇴했다

by soulsum

농담처럼 말했다, 나랑 같이 하노이 갈래?

2018년과 2019년 사이의 겨울은 생각만큼 춥지 않았다. 일감은 적었지만 버틸만했다. 외식을 줄였고 약속도 줄인채 겨울잠을 잤다. 이럴 때마다 도망치고 싶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괜찮을 것 같다. 해의 경계에선 항상, 연례행사처럼 연초에 나오는 특가 항공권을 찾아 매일 밤을 어슬렁거리곤 한다. 사진첩을 정리하다 지난 여름 연꽃이 진 연못에서 찍은 엄마의 사진을 마주했고, 가을 즈음 터키에 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엄마와 베트남에 다녀오기로 했다.

엄마는 원래 지난 가을 베트남 다낭으로, 겨울에는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부담스럽다던 계모임에서는 여행을 가기 위한 회비를 따로 걷었는데, 이미 회비 통장이 빵빵하게 찼다고 했다. 회비를 낼 때는 뼈와 살을 깎는 것 같지만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가는 여행은 공짜 같아서 좋다나. 그러나 회원들에게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몸이 아팠고 누군가는 마음이 아팠다. 무한정 늘어진 여행 계획. TV는 가히 여행 예능 전성시대를 맞고 있었고, 엄마는 텔레비전 여행 프로그램에 다낭이 나올 때마다 리모컨을 멈추곤 했다. TV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염마 옆에서 TV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비와 여행상품을 기획하는 여행사와의 이해관계, 항공사와 관광청의 계략 같은 걸 열심히 읊어줬지만 엄마의 허전함까지 채워주진 못하는 것 같다. 그 겨울 엄마는 눈에서 녹내장과 백내장을 긁어냈다. 빛을 보거나 찬바람을 쐬지 말라는 의사의 말에 두 달 가까이 칩거했고, 2월이 되자 집이 감옥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래서였을 거다, 엄마에게 함께 여행을 하자고 제안한 것은.

하지만 나는 엄마를 위해 이미 다녀온 다낭에 다시 갈 정도로 효녀가 아니다. 엄마가 가고 싶어 했던 다낭이 아닌 하노이에 가자고 했다. 하노이는 몇 해 전 초특가 항공권 예매에 성공하고 취직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취소했던 여행지였다. 엄마는 마침 하롱베이에도 가고 싶다 했고 나는 사파에 가고 싶었다. 두 곳을 모두 가려면 적어도 열흘은 필요할 것 같았다. 프로모션 중인 항공권을 찾아내 결제했다.


나의 여행 방식은 이렇다. 첫 날 묵을 숙소를 예약하고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동하는 법을 검색한다, 기왕이면 이동은 대중교통인 버스나 지하철로. 상대적으로 비용이 비싼 여행사 픽업서비스나 택시는 제외. 모든 결정은 즉흥적으로. 도착한 도시를 하루나 이틀 둘러보고 얼마나 머물 것인지 결정하고 다음 여행할 도시를 결정한다.

그러나 엄마와의 여행은 패키지 인솔자가 된 느낌이었다. 출발 전부터 준비할 게 많았다.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나이트 버스로 이동하던 패턴을 포기해야 하고, 도미토리 룸에서 잘 수도 없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혼자 여행할 때처럼 다양한 친구를 만날 수 없다는 점. 낯선 이와의 만남이라는 여행의 가장 큰 재미가 사라졌고, 온전히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역시 사라질 것임을 직감했다.


엄마와의 여행은 쉽지 않을 거다.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나이트 버스로 이동하던 패턴을 줄여야 할 것이고, 도미토리 룸 대신 호텔에 숙박해야 할 것이다. 혼자 여행하면서 길에서 만난 여행 메이트들처럼 ‘나 오늘 여기 갈 거다, 저녁에 보자’ 하는 말도 통하지 않을 거다. 출발하기도 전에 엄마와 24시간 붙어서 열흘 이상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커뮤니티에는 '엄마와 함께 여행하는 법'에 대한 조언이 적지 않았다. 장거리 이동을 피할 것, 호텔은 조식이 포함된 중굽 이상을 예약할 것, 투어는 반나절을 넘기지 말고 하루에 하나 이상 신청하지 말 것, '일일일스파'로 환심을 살 것 등등. 하지만 나는 전용 차량으로 이동해 럭셔리한 숙소에서 최고의 만찬을 즐겼던 엄마에게 다른 방식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는 내게 가이드 점수로 몇 점을 줄까.


2019.04.— sapa, Vie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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