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책임을 회피하는 언어

by 웰다잉말그릇

관계의 비밀,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언어


1. 그 말은 변명이 아니라 구조였다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그 문장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향한 방어였고, 동시에 책임을 밀어내는 구조적 언어였다.

상담실에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이 문장은

개인의 억울함을 넘어, 가족 체계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가족에게도 오래된 비밀이 있었다.

말해지지 않았고, 질문되지 않았으며,

누군가의 고통 위에 조용히 쌓여온 침묵의 역사였다.

가족은 그것을 “어쩔 수 없던 시간”이라 불렀지만,

치료자의 자리에서 나는 그것을 관계가 만든 위험이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2. 보호받지 못한 자리에 선 딸


내담자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그녀는 장애가 있는 오빠와 경제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늘 불안과 분노 사이를 오가던 어머니 곁에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정서적·현실적 역할을 떠안고 살아왔다.


그 역할은 선택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버텨야 했고,

가장 말이 잘 통하고, 가장 책임감을 보였던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부모는 보호자가 아니라 의존 대상이 되었고,

딸은 딸의 자리를 잃은 채

가족의 감정 조정자이자 생계의 일부를 책임지는 존재로 살아갔다.


3. 무너진 일상, 몸으로 나타난 신호들


결국 그녀는 대학을 휴학했다.

학업을 포기한 이유는 명확했다.

“지금은 살아내는 게 먼저여서요.”


불안은 일상이 되었고, 수면은 끊어졌으며,

설명되지 않는 공포와 긴장은

몸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해는 주목을 끌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남은 마지막 조절 방식이었다.


상담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은

그녀가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가족 안에서 고통을 말하는 순간,

그녀는 가족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4. 드러나야만 했던 진실


상담이 깊어지며,

가족 내부에서 오랫동안 은폐되어 왔던 사건이 드러났다.

아버지에 의한 성적 폭력,

그 이후 이어진 가족의 외면,

그리고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딸에게 전가된 경제적·정서적 책임.


이 글은 특정 사건을 고발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침묵이 반복될수록 피해는 개인의 몫이 된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고,

대신 문제를 “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 합의했다.

그 합의의 대가는 한 사람의 삶으로 치러지고 있었다.


5.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라는 외침


부모 상담 자리에서

나는 딸의 상태를 최대한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했다.

극심한 스트레스 반응, 만성 불안,

자기 파괴적 행동, 그리고 여성으로서 훼손된 자기 인식까지.


그 순간 어머니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외쳤다.

“우리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그 말에는 억울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책임을 회피하는 언어는

누군가의 고통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버지는 상담실을 떠났다.

분노를 남긴 채, 대화를 중단한 채.

그 장면은 이 가족의 오래된 패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6. 사랑은 책임이고, 침묵은 공모다


부모라는 이름은 감정이 아니라 기능이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책임의 지속성으로 증명된다.

보호해야 할 관계에서 보호가 사라질 때,

그 관계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관계의 비밀이 위험한 이유는

그 비밀이 누군가를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립은, 서서히 생명을 잠식한다.


치료자로서 나는 종종 무력감을 느낀다.

모든 개입이 생명을 구해내지 못할 때,

그 책임감은 오래 남는다.

그래서 기록한다.

회피하지 않기 위해,

침묵에 동의하지 않기 위해.


7. 이 글이 남기고 싶은 것


이 글은 비난을 위한 글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질문을 남기고 싶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외면이라는 선택을 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이

누군가의 삶에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정말 알고 있는가.


보호받지 못한 관계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사랑은 책임이며,

침묵은 결코 중립이 아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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