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그리고 정명훈
예술의 전당을 찾아 클래식 공연을 보고 맘껏 즐기더라도, 정말 '시간이 가는 것이 너무 아쉽다, 그냥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 하는 순간은 많지 않다. 11월 19일 밤은 바로 그러한 시간이었다.
2015년 11월 19일 우리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공연을 마주하였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은 몇몇 애호가의 불평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포텐셜을 터뜨리며 '내 울림이, 잔향이 원래 이정도야, 너네들이 연주만 잘해봐' 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우면산 자락에서 연주된 품격있는 동독 사운드, 아니 독일 사운드에 매료 당한 2천500여명의 청중은, 한 동안 그 어마무시한 사운드의 잔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언제 오나 했더니
드디어 SKD가 오는구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Staatskapelle Dreden, 이하 SKD)는 동독의 자존심인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이다. 베를린필 처럼 일반 대중에까지 잘 알려진 악단은 아니지만 클래식을 좀 들은 사람들은 모를리 없는 독일을 대표하는 악단이 분명하다.
카를뵘, 시노폴리 등 유수의 지휘자가 거쳐간 SKD는 최근 틸레만이라는 '독일 적자'를 앞세워 전통의 독일 사운드 구현에 앞장서고 있다.
가장 독일 스런 사운드, 거칠지만 정교하고, 두텁지만 무겁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싶어 했다.
2009년 내한 이후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그런 그들이 드디어 온다는 소식에 나는 들떴다.
한 지방지에는 도시간 수교를 논하며 틸레만이 SKD를 이끌고 내한한다는 식의 기사가 나기도 했었고, 드디어 무시무시한 박력있는 독일 사운드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지휘는 틸레만이
아닌 정명훈?
그러나 이후 알려진 소식은 아시아 투어에는 수석객원지휘자인 정명훈의 지휘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양일간 말러 교향곡 6번과 베토벤 교향곡 2번, 3번이 프로그램이다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결과적으로 양일 같은 프로그램으로 결정되었고, 그것은 소문대로 베토벤 교향곡 2번과 3번 '영웅' 이었다.
정명훈 선생의 지휘는 서울시향에서 꽤 접해보았기에 솔직한 마음은 아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독일 적자 틸레만이 구현하는 거친 독일 사운드' 에 대한 욕심이었을까
그렇지만 사실 엄밀히 보더라도 SKD와 정명훈 선생의 만남은 한국 공연을 위한 급만남이 아니었다.
정명훈 선생은 이 악단의 최초의 '수석객원지휘자'이며 이미 이 악단의 정기 공연은 물론 유럽 순회 공연도 이끄는 등 이미 각별한 사이였다.
정명훈/서울시향에 익숙한 한국 청중들에게 정명훈/SKD 조합은 어떤 사운드를 들려줄지, 이 점만으로도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던 것이다.
무산된 평양 공연과
SKD+SPO
드레스덴 시는 올해 아시아 투어에서 평양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적극적이었다고 알려졌었다.
정명훈이라는 대한민국 지휘자를 앞세워, 서울시향(SPO) 현악 수석진이 가세한 합동 공연을 서울과 평양에서 진행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평양 공연은 결국 무산되었고, 서울 공연에서의 서울시향 현악 수석진의 깜짝 출연도 없던 일이 되버렸다.
굳이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평양 공연 취소로 인한 충분한 휴식기간이 단원들의 컨디션 조절에는 좋았을 것이다.
또한, 용병(?) 없는 SKD만의 사운드 구현에는 더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베토벤을 대하는
SPO의 정명훈?
서울시향 그리고 정명훈 선생의 열렬한(?) 지지자이지만 서울시향을 세계 최강이라고 부르긴 어려울 테다.
(물론 아주 좋은 오케스트라임에 분명, 국내에 이런 악단이 있다는게 기적에 가깝다)
서울시향에서 정명훈 선생은 시향이 잘할 수 있는 레파토리를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그런 면에서 시향은 프렌치 음악과 후기 낭만만큼은 어디 빠지지 않을만큼의 악단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기형적으로 현악의 숫자를 늘리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 목관의 더블링도 그리 이상치 않은 편성이 된지 오래이다.
시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맞춰 정명훈 선생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시향에 있어 늘 정통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이 걸림돌이었다. 베토벤, 브람스 등 어쩌면 대중에겐 가장 익숙한 작곡가들의 음악은 S급 오케스트라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예를 들자면, 작년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보면 1악장에서 지휘자가 템포를 쭉 빼다가 여의치 않아 다시 눌러 앉는 듯한 인상이 있었다.
또한, 2년전 진행한 베토벤 교향곡 3번에서도 팀파니, 금관이 받쳐주질 않으니 제대로 된 사운드가 잘 나오질 않았던 기억도 난다.
SKD의 정명훈은 달랐다
SKD라는 훌륭한 재료가 주어지자 정명훈 선생은 있는 힘껏 자신의 색깔을 보여준다. 특유의 템포는 어제 공연에서 빛을 발했는데, 교향곡 3번 1/2악장이 대표적이겠다.
여타 지휘자들 보다 무서운 속도로 1악장을 끌고간 정명훈 선생에 놀랐는지 초반에 목관군의 소리가 살짝 어긋나는 소리도 들렸지만 독일 대표 사운드 답게 이내 지휘자의 비팅을 따라간다.
그리고 이어진 2악장(장송행진곡)은 처연한 감정을 담아 한음한음 꾹꾹 누르며 연주해나간다. 마치 종교음악을 대하듯 지휘자는 자신의 온몸을 던져서 곡을 표현해낸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추모곡으로 바렌보임의 지휘로 이태리서 연주되었던 이 장송행진곡보다도 더욱 더 깊게 느껴진 연주였다.
흔히 말하는 정통 독일인 지휘자의 해석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정선생의 해석은 인간의 내면을 깊게 울렸고, 독일 사운드로 구현되자 더 마음에 깊이 박혔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
현악의 질감
현악의 질감은 말도 안되게 두터웠다. 단지 싱크가 잘 맞는다고 음량이 크다고 양감있는 소리가 전달되진 않는다. 개개인의 악기, 기량 등 많은 요소들의 합이 맞아야 두터우면서도 무겁지 않는 질감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SKD의 현악군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교향곡 2번은 12-10-8-6-4 구성의 40명 현악군, 교향곡 3번은 14-12-10-8-6 의 50명 현악군이 참여했다. 두곡 모두 훌륭했는데 교향곡 2번 첫 악장의 첫 소리의 질감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도
SKD와 정명훈을
기대한다
정명훈 선생은 더 이상 한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직은 맡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런 정선생에게도 SKD에서의 객원수석과 같은 자리는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결과라고 본다.
또한 베를린필이 단단하지만 사이먼 래틀 시대 이후 게르만의 투박함이 부족해진 점도 있는데 SKD는 동독의 자존심을 살려 지금과 같은 사운드를 계속 구현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더불어 적자나면서도 좋은 공연을 유치해주는 기획사 빈체로도 승승장구하길 기원한다.
표지 사진 출처 :
staatskapelle-dresden.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