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의 주말

여름휴가

by 흰 점

한여름, 기후위기를 실감케 하는 열대야가 지속되었다. 숨이 막혀 바깥에 나가기가 두려운 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휴가를 다녀왔다. 이제 빈 집이 되어버린 할아버지 댁을 거점으로 지리산과 고흥 광양 벌교 등지를 돌아다녔다. 주로 산과 계곡에서 쉬고, 뜨거운 태양 아래 바닷물 속에 잠겨 있기도 하였고, 시원한 미술관에서 좋은 작품들 구경하며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였다.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났으나 정작 노고단 한 번 제 발로 올라가 보지 않았던 터라 벼르고 벼렸던 산행. 오래전 준비 없이 올라간 한라산에서의 고충이 기억나 한 짐 가득 철저히 준비했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산행은 자동차로 가 닿았고, 고작 두어 시간 올라가니 정상이었다. 그나마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서인지 산림이 훼손되어 있고, 풀과 나무가 자라기 힘든 상황이라는 안내표지를 보았다. 며칠씩 걸린다는 지리산 등반, 산등선 어디선가 취식을 해야 하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살짝 씁쓸함을 안고 내려오며 하릴없이 창밖을 내다보는데, 천은사 가는 길 표지판이 보였다. 천은사? '하늘 천'에 '은혜 은'인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이야기겠지? 살짝 망설이다 핸들을 틀어 그리로 들어갔다. 무심코 주차를 하고, 주차장 한편에 나있는 작은 돌계단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광경. 너무 예쁜 호수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작은 해변(?)과 호수를 둘러싼 산자락, 호수를 숨기려는 듯 크게 자라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광이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알고 보니 미스터 선샤인의 촬영지였다 한다. 천은사의 한자도 '내 천'에 '숨길 은'이라고... 바로 모습 그대로 지어진 이름.

꽤 큰 호수를 그대로 한 바퀴 돌았다. 가다가 발이 아파 맨발로 걸었다. 맨발에 닿는 감촉이 고통을 줄이고 나로 그들과 하나로 맞이해 주는 듯. 천은사의 기억이 잊지 못할 경험으로 와닿았다. 사찰도 호수만큼이나 예뻤다. 정갈하고 관리가 섬세하며 무엇보다 애신 아씨가 오가던 곳, 일제의 총칼에 애신 아씨의 일족이 몰살되던 곳의 느낌과 장면들이 떠오르며 이 사찰은 실제 그 당시에 어떤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한 달, 네 번의 주말이 지나갔지만,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더웠던 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 시간들. 오로지 4박 5일의 휴가만이 머릿속에 가슴속에 온 몸에 기억이 되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가족들과 자주 여행을 다녔지만, 이번처럼 편안한 여행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 댁이 거점이 되어주어서였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할아버지께 감사하며, "우리 다시 한번, 아니 자주 꼭 오자. 계절마다 오자!" 남편과 아이들과 다짐하며 다시 불볕더위 속으로, 기후위기 실감케 하는 열대야 속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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