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차리는 손
시골 마당에 흰 천막으로 텐트를 치고 그 아래 하늘만큼 쌓아놓은 떡, 과일, 약과, 수제 사탕, 그리고 온갖 종류의 산해진미. 그 상을 받으신 분은 우리 할아버지셨다. 한 장의 사진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는 시골의 축제. 할아버지 할머니를 축하하며 장손이었던 막내 남동생이 절을 하였고, 딸들은 죽 늘어서서 그것을 구경하였다. 나도 절하고 싶었으나 내 차례는 없었다. 이후 제사상 앞에서도 딸들에게는 절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몇 가지 절차가 치러진 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밥상을 받았다. 할아버지 댁 마당을 거의 가득 채운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들 사이를 유랑하며 맛난 것을 얻어먹기도 하고,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던 나는 그날 저녁까지 이어진 이 놀이가 무척이나 신기했다. 술에 취한 할머니가 덩실덩실 춤을 추시고, 사람들은 서로 자리바꿈이라도 하듯이 저녁까지 몰려왔다. 이웃마을까지 소문이 났던 게 틀림없다.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춤추는 할머니를 보며 전을 부치던 고모들이 함께 웃었다. 그네들은 연신 전을 부쳤고, 음식은 잘 먹지 못했다. 바쁘기도 하였지만, 기름 냄새를 하도 맡아서 먹지 못하겠다 하였다. 중간중간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아예 부엌에서 나오시지 못했다. 고모들은 마루에 앉아 전을 부치고, 엄마와 작은 엄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냈다. 할머니는 부엌과 마당을 오가며 사람들을 챙겼다. 호탕하신 우리 할머니는 바쁜 와중에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술도 마시고, 춤도 추었다. 아, 할아버지는.... 정작 주인공이셨지만, 내 기억 속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라고 그 유명한 애덤 스미스가 말했다. 우리가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듯 이익을 좇는 각자의 욕구가 교환을 통해 충족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잊은 것이 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누가 차려줬겠는가. 정작 보이지 않는 손은 부엌에 있던 엄마와 작은 엄마, 종일 전을 부치던 고모들이었고, 할머니였다. 카트리네 마르살이 쓴 위의 책,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는 우리 삶의 어쩌면 핵심일지도 모르는 돌봄의 가치, 보이지 않는,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던 돌보는 손의 가치를 조명하고 있다.
시대가 변했고, 이제는 자주 남편이 부엌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 하여 밥 차리는 손이 경제적 주체로서 사회적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당연한 역할’에 구속되고, 물과 공기와 같은 ‘평균 가치’ 일뿐 가치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마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웃음은 엄마들과 고모들의 절대적인 희생에 기반하였다. 누군가의 고통에 기반한 행복은 그 고통에 무지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 아닐까. 기쁨과 눈물과 행복과 한숨과 희망과 절망이 한 세상에 동시에 가득한 오늘, 잠시 눈 감고 모른 척할까 알아챌까 어떻게 할까. 삶이 편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