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냉동실에 전화기를 넣었던 날
나이가 들며 가장 먼저 달라진 건 기억력이었다.
예전엔 약속 날짜, 아이 준비물, 장볼 품목까지 머릿속에만 정리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잠깐만 정신을 딴 데 두면 방금 하려던 일도 금세 사라진다. 나도 이런 사람이었나 싶어 놀라기도 하고, 가끔은 속상하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릴 적, 엄마가 무선 전화기를 냉동실에 넣으셨던 일화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고, 결국 차갑게 묻혀 있던 전화기를 발견했을 때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한동안 얼굴을 붉히셨지만, 그 사건은 지금까지도 우리 가족 모임의 단골 소재다.
이제는 내가 그 나이가 되었고,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리모컨이 없어 온 가족이 거실을 뒤집는 일이 흔하다. 어떤 날은 빨래 바구니에서, 또 어떤 날은 아이 방 침대 밑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발견된다. 황당하면서도 웃음이 난다.
그래서 정해진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거실 테이블 옆 바구니에 모든 리모컨을 모아두고, 열쇠는 현관 옆 자석 걸이에, 아이팟은 침대 머리맡 케이스에 둔다. 단순한 습관이 건망증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물건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도 잊는다. 아이 학교 서류, 병원 예약, 시댁 약속까지 머릿속에서 빠져나가기 일쑤다. 이제는 휴대폰 메모와 알람, 냉장고 포스트잇이 나의 든든한 기억 보조 장치다.
집을 나설 때도 다섯 가지를 중얼거린다.
“지갑, 휴대폰, 열쇠, 가스, 창문.”
아들은 그런 나를 보며 웃지만, 덕분에 돌아갈 일은 줄었다.
건망증의 원인은 물건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끔 집안을 비워낸다. 정리된 공간을 바라보면 마음도 가벼워지고, 필요한 물건도 한눈에 들어온다. 단순함이 기억을 돕는다는 걸 깨닫는다.
머리도 운동이 필요하다. 퍼즐을 맞추거나 책을 읽고, 이렇게 글을 쓰며 기억을 더듬는다.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는 것도 좋은 뇌 운동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다. 깜빡한다고 나를 책망하지 않는 것.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잊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유머로 바꾸면, 삶이 훨씬 가벼워진다.
리모컨을 찾다 발견하면 나는 말한다.
“그래도 냉동실은 아니지?”
아들도 깔깔 웃는다. 그 순간 건망증은 추억이 된다.
문득, 냉동실 속 전화기를 들고 머쓱하게 웃던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는 왜 엄마가 자주 깜빡하셨는지 몰랐지만, 이제야 이해한다. 바쁘게 살다 보면, 마음에 담아둔 게 많다 보면 기억의 조각은 흘러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엄마도, 지금의 나도, 언젠가 내 아이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그래서 건망증이 두렵지 않다. 잊는 순간조차 삶의 한 장면이고, 시간이 쌓여 남는 건 결국 따뜻한 웃음과 추억이니까.
삶은 기억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잊음마저 품어내는 넉넉함, 그것이 나이 들어 얻는 또 하나의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