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공기는 아직 차다.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지만,
초등학교 교문 앞만큼은 이미 봄의 한복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매년 3월 2일 혹은 3일. 누군가에게는 평생에 한두 번 겪는 특별한 통과의례지만,
학원을 운영하는 남편에게 이 날은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거른 적 없는 치열하고도 정겨운 연례행사다.
올해는 나도 그 분주한 풍경 속에 발을 들였다.
남편을 돕기 위해 학교 앞으로 나서는 길, 양손에는 묵직한 꾸러미들이 들려 있었다.
지앤비 캐릭터가 그려진 달력, 학원의 교육 철학이 담긴 프로그램 가이드,
그리고 아이들이 생전 처음 접할 꼬불꼬불한 영어 단어들을 정성껏 받아 적을 알파벳 노트.
이 작은 선물 꾸러미들은 며칠 전부터 거실 한구석에 쌓여 우리 부부의 손길을 거친 것들이다.
누군가에겐 흔한 전단지 뭉치일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올 한 해 인연을 맺을 아이들에게 건네는 첫 번째 명함이자 정성이었다.
학교 정문 앞은 이미 거대한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노란 학원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사이사이로 태권도 도복을 입은 사범님들, 앞치마를 두른 미술 선생님, 단정한 차림의 피아노 학원 원장님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화려한 전단지와 알록달록한 막대사탕, 작은 학용품들이 공중을 오갔다.
학습지와 공부방 홍보 인파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교육 서비스의 각축장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영어 학원은 우리뿐이었다. 묘한 책임감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남편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익숙하면서도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나오는 물건, 바로 분홍색 돼지 캐릭터 모자였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그 모자를 머리에 썼다.
점잖은 체통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질색할 법한 광경이었지만,
남편은 오히려 싱글벙글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아내인 내 입장에서는 가끔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길을 지나는 학부모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릴 때마다 쑥스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곤 했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는 이 돼지 모자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고 말한다.
낯선 학교라는 공간에 첫발을 내디뎌 잔뜩 긴장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덩달아 가슴 졸이는 학부모들에게 작은 웃음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훗날 아이들이나 부모님이 학원을 찾아왔을 때,
"아, 학교 앞에서 돼지 모 쓰고 웃으며 선물 나눠주던 그 원장님!"
하고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의 단초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실제로 효과는 상당했다.
쭈뼛거리며 엄마 손을 꼭 잡고 걸어오던 아이들이 남편의 우스꽝스러운 돼지 모자를 보고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학부모의 얼굴에도 찰나의 여유가 스쳤다.
남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의 눈을 맞추며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 봉투를 건넸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장사꾼이 아니라, 아이의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원장실 한쪽에는 늘 그 돼지 캐릭터 모자가 놓여 있다.
학원을 방문한 학부모들이 상담실에 앉아 그 모자를 발견하고는
"어머, 그때 학교 앞에서 뵈었던 분 맞죠?"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곤 한다.
남편의 전략은 적중한 셈이다.
그는 화려한 광고 문구보다 사람의 기억 속에 남는 따뜻한 이미지 한 조각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입학식 시간이 되고 학부모와 아이들이 모두 강당으로 들어간 학교 앞,
남편과 나는 빈 박스를 정리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조금은 피곤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뿌듯함으로 차올랐다.
오늘 우리가 건넨 것은 단순한 달력과 노트가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의 문턱에서 만난 기분 좋은 유머였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영어라는 낯선 세상을 향한 친근한 첫인상이었을 것이다.
올 한 해도 이 돼지 모자의 마법이 통하기를 바란다.
학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가볍기를,
그리고 원장실에 놓인 분홍색 모자를 보며 아이들이 한 번 더 웃음 짓기를 기대해 본다.
무엇보다 올 한 해, 우리 학원의 복도마다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남편의 돼지 모자가 그 웃음의 씨앗이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