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Wall)은 우리를 보호하는가, 사육하는가?

<진격의 거인>,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안 자유와 안보의 딜레마

by JUNSE

관점 프리즘 No.11

벽(Wall)은 우리를 보호하는가, 사육하는가?

<진격의 거인>,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안 자유와 안보의 딜레마

출처 : 왓차 '진격의 거인 part 1'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첫 장면은 압도적인 공포와 함께 시작됩니다. 식인 거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50미터 높이의 거대한 벽을 쌓고, 그 안에서 100년 동안 숨죽여 살아왔습니다. 벽 안은 안전하고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엘렌 예거는 그 평화를 "가축의 안녕"이라 부르며 혐오합니다. 그는 벽 밖의 세상, 즉 위험하지만 자유로운 세상을 갈망합니다.


이 작품을 보며 저는 17세기 영국의 정치 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와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류가 거인(자연의 위협)을 피해 벽(국가/권력)을 세운 이 설정은, 홉스가 말한 '사회계약론'의 탄생 과정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 벽 밖의 자연 상태

출처 : Getty Images. n.d. “Details from Abraham Bosse’s Frontispiece for Leviathan by Thomas Hobbes.”

홉스는 국가나 법이 존재하지 않는 원초적인 상태를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힘센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가 지배하는 세상. 홉스는 이 상태의 삶을 "고독하고, 가난하고, 더럽고, 잔인하고, 짧다"고 묘사했습니다.


<진격의 거인>에서 벽 밖의 세상이 바로 이렇습니다. 인간은 거인이라는 압도적인 포식자 앞에서 무력하며, 삶은 처참하게 유린당합니다. 이 지옥 같은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류는 선택을 합니다. 자신의 천부적인 자유(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를 일부 포기하고, 거대한 절대 권력에게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위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작품 속의 '벽(Wall)'이자,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국가)'입니다. 리바이어던은 성서에 나오는 거대한 바다 괴물의 이름입니다. 홉스는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만이 개인 간의 투쟁을 멈추고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리바이어던의 역설 : 보호자인가, 괴물인가?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인류는 벽(리바이어던) 덕분에 거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벽 안의 인류는 '바다'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야 했고, 벽 밖으로 나가려는 호기심은 '금기'가 되었습니다. 왕정은 정보를 통제하고, 진실을 알려는 자들을 은밀히 제거했습니다.


홉스의 이론에서도 리바이어던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집니다. 개인은 국가에 저항할 권리가 거의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 자유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격의 거인>은 묻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는 그 절대 권력이, 사실은 우리를 잡아먹는 또 다른 괴물이라면?"


작품이 진행될수록 벽은 단순한 방어막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벽 자체가 수천만 마리의 거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충격적인 진실은, 국가(리바이어던)라는 시스템이 사실은 개인들의 희생과 억압을 재료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끔찍한 은유입니다. 우리는 거인(외부의 적)을 피하기 위해 더 거대한 거인(내부의 시스템) 속에 스스로를 가둔 셈입니다.



엘렌 예거의 선택 : 안전한 가축 vs 자유로운 악마

출처 : 엘렌 예거 - 나무위키

주인공 엘렌 예거의 여정은 이 리바이어던의 계약을 파기하려는 처절한 투쟁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자유다"라고 외치며,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자유의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벽 밖에는 또 다른 적들이 있었고,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거인의 힘을 빌려 세상을 파괴해야만 했습니다. 홉스의 관점에서 보면, 엘렌은 리바이어던이 보장하던 질서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다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 즉 지옥으로 되돌리는 혼돈의 화신입니다.


하지만 엘렌은 묻습니다. "거짓된 평화 속에서 사육당하는 가축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늑대처럼 자유롭게 죽을 것인가?"



우리에게 벽은 무엇인가

출처 :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 스틸컷 ⓒ㈜애니플러스 / 시사저널

<진격의 거인>이 남긴 질문은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우리는 안전과 편리를 위해 수많은 시스템(법, 제도, 관습, 기술)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갑니다. 이 '보이지 않는 벽'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지만, 동시에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고 행동을 통제합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우리는 리바이어던이 제공하는 안락함에 취해, 벽 너머의 바다를 상상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엘렌의 방식(땅울림)은 극단적이고 파괴적이었지만, 적어도 그가 던진 화두만큼은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울타리를 의심하고 넘어설 때, 그에 따른 무거운 책임과 공포를 감당할 각오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서늘한 바람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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