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왜 세상은 '고요'해질까?

눈이 내리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음향학

by JUNSE

Sound Essay No.68

눈이 내리면 왜 세상은 '고요'해질까?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음향학 : 하늘이 도시를 위해 깔아준 '거대한 흡음재'

joseph-pearson-5zrYzjN8fms-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Joseph Pearson

1. 도시의 볼륨을 줄이는 하얀 마법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밤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면, 시끌벅적하던 도시는 마법에 걸린 듯 순식간에 고요함 속으로 잠겨듭니다. 자동차의 날카로운 경적 소리는 뭉툭해지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아득하게 멀어집니다. 세상 전체가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쓴 듯, 포근하고 아늑한 정적(Silence)이 흐르죠.


많은 사람들이 이 고요함을 그저 '기분 탓'이나 '낭만적인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운드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착각이 아닙니다. 눈(Snow)이 가진 독특한 물리적 구조가 만들어낸 아주 정교하고 과학적인 '음향학적 현상(Acoustic Phenomenon)'입니다. 눈이 내리는 날, 우리가 사는 도시는 거대한 '무향실(Anechoic Chamber, 소리의 반사가 없는 방)'로 변신하기 때문입니다.



2. 90%의 공기 구멍 : 하늘에서 내리는 스펀지

kristina-kutlesa-ZKNXCHy0h28-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Kristina Kutleša

비(Rain)와 눈(Snow)은 같은 물방울이지만, 소리에 미치는 영향은 정반대입니다. 비는 바닥을 때리며 '타격음'을 만들어내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지만, 눈은 소리를 삼켜버립니다. 그 비밀은 눈의 '결정 구조'에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갓 내린 눈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육각형의 얼음 결정들이 복잡하게 엉겨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들 사이사이에는 무수한 빈 공간(Air Pocket)이 존재합니다. 놀랍게도 갓 쌓인 눈의 부피 중 약 90~95%는 얼음이 아니라 '공기'입니다. 즉,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고성능 다공성 흡음재(Porous Absorber)'인 셈입니다.


음향 스튜디오 벽에 붙어 있는 스펀지(흡음재)와 원리가 똑같습니다. 도시의 소음(음파)이 눈 쌓인 바닥이나 나뭇가지에 부딪히면, 딱딱한 벽처럼 반사되어 돌아나가지 못합니다. 대신 눈송이 사이의 미로 같은 공기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 갇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소리의 운동 에너지는 눈 결정과의 마찰열로 바뀌어 소멸해 버립니다.


흡음률의 드라마틱한 차이 : 평소의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바닥은 소리의 90% 이상을 반사해 도시 전체를 시끄럽게 울립니다(Reverb). 하지만 푹신하게 쌓인 눈은 소리의 60% 이상을 흡수해 버립니다. 특히 자동차 타이어 마찰음이나 기계음 같은 고주파 소음(High Frequency)을 아주 잘 잡아먹습니다. 그래서 눈 온 날 아침은 유독 저음의 부드러운 소리만 남아 차분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3. '신호 대 잡음비(SNR)'의 상승 : 속삭임이 더 크게 들리는 이유


자연이 도시의 '배경 소음(Background Noise)'을 강제로 제거하면(Mute), 아주 흥미로운 심리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신호 대 잡음비(Signal to Noise Ratio)'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주변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작고 소중한 소리들이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교회 종소리,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연인의 숨소리와 옷자락 스치는 소리까지.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데이트하면 더 로맨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잡음이 사라진 '무향실'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에 더 완벽하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작은 속삭임도 아주 크고 가깝게 들리는 이 '음향적 친밀감(Acoustic Intimacy)'은 물리적 거리마저 좁혀주는 효과를 냅니다.



4. 1년 중 가장 조용한 축복

r-g-BWNYiAYuRVE-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R. G

눈은 차갑지만, 눈이 만드는 소리 풍경(Soundscape)은 세상 그 무엇보다 따뜻합니다. 오늘 밤, 만약 창밖으로 눈이 내린다면 잠시 TV와 음악을 끄고 창문을 열어보세요. 혹은 밖으로 나가 그 압도적인 고요함 속에 서 있어 보세요.


그것은 하늘이 1년 동안 시끄러운 소음 공해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인간 세상을 위해 선물한 '천연 방음벽'이자 '휴식'입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시끄러운 세상 소리 말고, 네 마음속의 소리를 들어보렴." 하고 말이죠.


모든 소음이 잠든 이 고요하고 거룩한 밤, 당신의 마음속 가장 소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Sound of Silence)'를 온전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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