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어떻게 전쟁을 이기는가?
Sound Essay No.69
1. 지옥의 한복판에서 들려온 노래
19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벨기에의 플랑드르 전선. 진흙과 시체가 뒤엉킨 참호 속, 영하의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던 영국군 병사들의 귀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불과 100미터 앞, 서로를 죽이기 위해 총구를 겨누고 있던 독일군 참호 쪽에서 작은 촛불들이 하나둘 켜지더니, 낯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Stille Nacht, heilige Nacht...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한 독일 병사가 부르기 시작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기관총 소리와 비명 소리만이 지배하던 '죽음의 공간'에, 악기가 아닌 인간의 '맨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차가운 밤공기를 타고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 양측 참호 사이의 무인지대)'를 건너 영국군에게 닿았습니다. 잠시 후, 기적처럼 영국군 참호에서도 화답하는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Silent night, holy night..."
2. 언어는 다르지만 '주파수'는 같다
이날 일어난 '크리스마스 정전(Christmas Truce)'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사운드 드라마입니다. 장교들의 엄격한 사격 명령도, 적에 대한 증오심 교육도, '음악'이라는 강력한 파동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왜 하필 음악이었을까요? 백기를 든 것도 아니고, 편지를 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Text/Logic)'는 서로 다르고 논리적이기에 오해와 분열을 낳기 쉽습니다. 하지만 '선율(Sound/Music)'은 뇌의 이성 영역을 우회하여, 감정을 관장하는 '변연계(Limbic System)'를 직접 타격합니다.
독일어와 영어를 몰라도 상관없었습니다. 그 떨리는 멜로디 속에 담긴 "집에 가고 싶다", "너무 춥다", "오늘만큼은 죽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진심은 공통된 주파수가 되어 서로의 심장을 '공명(Resonance)'시켰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에게 '죽여야 할 적(Target)'이 아니라, '똑같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3. 혐오를 덮어버린 '화음'의 힘
노래가 끝나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양쪽 병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를 버리고 참호 밖으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시체가 뒹굴던 '노 맨스 랜드' 한복판에서 만나 서로 악수를 하고, 포옹을 했습니다. 적으로 만났던 그들은 담배를 나눠 피우고, 굳은 빵과 초콜릿을 선물하고,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웃었습니다. 심지어 빈 깡통을 차며 함께 축구 경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날 밤, 그곳에는 전쟁이 없었습니다. 오직 음악이 만들어낸 평화의 공간만이 존재했습니다. 총소리라는 기계적인 '파괴의 소음'이 멈추고, 캐럴이라는 인간적인 '화합의 음악'이 채워지자, 지옥은 순식간에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의 변화가 물리적 현실까지 바꿔버린 것입니다.
4. 당신의 캐럴은 어디로 향하는가
물론 며칠 뒤, 전쟁에 미친 상부의 명령에 의해 다시 총성은 울려 퍼졌고, 이 전쟁은 4년이나 더 지속되며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누군가는 그날의 정전이 일시적인 해프닝에 불과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짧은 하룻밤의 기적은 우리에게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를 던져줍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죽이려 하는가,
아니면 서로 노래하고 사랑하려 하는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포성이 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우리가 부르는 캐럴이, 우리가 듣는 음악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운드 디자이너로서 저는 확신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운드는 웅장한 오케스트라나 수천만 원짜리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1914년 12월 25일, 춥고 더러운 참호 속에서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이, 적을 향해 불렀던 그 투박한 '떼창'이야말로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소리였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크리스마스에도, 미움 대신 이해가, 소음 대신 음악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Merry Christ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