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음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초콜릿이 더 달다?

미각을 해킹하는 '소닉 시즈닝(Sonic Seasoning)'

by JUNSE

Sound Essay No.75

고음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초콜릿이 더 달다?

미각을 해킹하는 '소닉 시즈닝(Sonic Seasoning)': 설탕 없이 소리로 간을 맞추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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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맛은 혀끝이 아니라 귀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흔히 맛(Taste)을 혀의 미뢰가 느끼는 화학적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리사들은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좋은 식재료와 양념에 집중하죠. 하지만 옥스퍼드 대학의 실험 심리학자 찰스 스펜스(Charles Spence) 교수의 생각은 다릅니다.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혀가 아니라 '뇌'이며, 청각은 미각을 조종하는 가장 강력한 리모컨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다크 초콜릿(카카오 함량 70% 이상의 쓴맛이 나는 초콜릿)을 나눠주고, 두 가지 서로 다른 음악을 들려주며 맛을 평가하게 했습니다.



A 그룹: 낮고 묵직한 첼로 연주곡 (Low Frequency)

B 그룹: 높고 경쾌한 피아노나 플루트 연주곡 (High Frequency)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똑같은 초콜릿이었지만, 고음의 음악을 들은 B 그룹은 "초콜릿이 훨씬 더 달콤하고 부드럽다"고 느꼈고, 저음의 음악을 들은 A 그룹은 "평소보다 더 쓰고 깊은 맛이 난다"고 평가했습니다. 소리의 주파수만 바꿨는데, 뇌가 느끼는 당도(Sweetness)가 변한 것입니다.



2. 뇌의 착각 : 크로스 모달리티(Cross-modality)

6344903b20e84623a19e74f11a8fd915.jpg 출처 : news.cgtn.com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이것은 우리 뇌가 감각 정보를 따로 처리하지 않고, 서로 뒤섞어 처리하는 '교차 감각(Cross-modality)' 또는 '공감각적 전이'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적으로 인간은 자연물에서 소리와 맛의 연관성을 학습해왔습니다.


고음(High Pitch): 잘 익은 과일, 달콤하고 산미가 있는 음식, 가벼움, 즐거움.

저음(Low Pitch): 쓴맛, 탄 맛, 훈제 향, 묵직함, 상한 음식 혹은 독성(경고).


이 오래된 데이터베이스 때문에, 뇌는 높은 주파수의 소리를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아, 지금 달콤한 것이 들어오는구나"라고 예측하고, 미각 신호를 '단맛' 쪽으로 보정(Calibration)해 버립니다. 반대로 낮은 주파수는 '쓴맛'이나 '감칠맛(Umami)'을 증폭시킵니다.


이를 '소닉 시즈닝(Sonic Seasoning, 소리 양념)'이라고 부릅니다. 소금이나 설탕을 치지 않고, '주파수'를 뿌려서 간을 맞추는 기술이죠.



3. '디지털 감미료'의 시대가 온다


이 연구는 단순한 심리 실험을 넘어, 식품 산업과 헬스케어 분야의 혁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이어트와 당뇨 환자를 위한 소리: 설탕을 줄여야 하는 당뇨 환자나 다이어터들에게 희소식입니다. 커피나 케이크를 먹을 때 설탕을 덜 넣는 대신, 스마트폰으로 '단맛을 증폭시키는 음악(Sweet Playlist)'을 들으며 먹으면 뇌는 충분히 달다고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영국의 한 카페에서는 "소리 설탕(Sound Sugar)"이라는 이름으로 이 서비스를 시범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맥주와 와인의 맛 조절: 기네스 같은 흑맥주는 저음이 강조된 재즈와 마실 때 그 쌉쌀하고 크리미한 맛이 극대화됩니다. 반면, 상큼한 화이트 와인이나 과일 맥주는 고음의 팝송과 마실 때 산미가 살아납니다.



4. '소리'라는 조미료통을 식탁 위에

Digital_Gastronomy_Cover.jpg 출처 : www.3dnatives.com

우리는 지금까지 식탁 위에서 소금과 후추 통만 찾았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식당 메뉴판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스테이크의 굽기는 미디엄으로, BGM은 묵직한 콘트라베이스 솔로로 부탁해요."


자신이 원하는 맛을 내기 위해 음식에 소금을 치듯, 이어폰을 꽂고 원하는 주파수의 음악을 고르는 시대. 이것이 사운드 디자인이 열어갈 '디지털 미식(Digital Gastronomy)'의 풍경입니다.


오늘 간식을 드실 때 한 번 실험해 보세요. 달콤한 케이크를 먹을 땐 모차르트의 피아노 곡을,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마실 땐 첼로 독주곡을 틀어보세요. 당신의 혀가 아닌 귀가, 그 맛의 깊이를 완전히 바꿔놓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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