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시간을 조각하는 예술이다

스트라빈스키와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흐르는 시간(Durée)'의 미학

by JUNSE

Sound Essay No.108

음악은 시간을 조각하는 예술이다

스트라빈스키와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흐르는 시간(Durée)'의 미학

pete-f-JWzqVaxWEvg-unsplash.jpg 사진 : Unsplash의 Pete F


1. 공간을 잃어버린 예술, 시간을 얻은 예술


미술관에 가서 모나리자를 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당신은 그림의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원하는 부분부터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회화와 조각은 '공간(Space)'을 점유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시간의 제약 없이 언제든 존재합니다.


하지만 음악은 다릅니다. 베토벤 교향곡 5번을 '한눈에' 들을 수는 없습니다. 첫 음이 울리고 사라져야만 다음 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음악은 찰나에 태어나서 찰나에 죽습니다. 공간을 점유하지 못하는 대신, 음악은 '시간(Time)'이라는 축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숙명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음악가는 캔버스 대신 '흐르는 시간' 위에 집을 짓습니다. 3분, 혹은 1시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 덩어리를 깎고, 늘리고, 멈추게 만듭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시계가 가리키는 객관적인 시간이 멈추고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이 흐르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음악이 가진 가장 철학적인 힘, 바로 '시간 조각(Sculpting in Time)'입니다.



2. 크로노스(Chronos) vs 카이로스(Kairos)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크로노스 (Chronos) : 시계가 똑딱거리며 흘러가는 물리적이고 정량적인 시간.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건조한 시간. (가로축의 시간)


카이로스 (Kairos) :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이고 정성적인 시간. 몰입의 순간이나 결정적 기회처럼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시간. (세로축의 시간)


현대인은 크로노스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시간이 없다", "늦었다"며 시계바늘에 쫓깁니다. 하지만 음악을 듣는 순간, 우리는 크로노스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카이로스의 세계로 진입합니다.


좋아하는 교향곡이나 재즈 연주에 깊이 몰입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10분의 곡이 1분처럼 짧게 느껴지기도 하고(시간의 압축), 반대로 3분의 짧은 곡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합니다(시간의 확장). 음악은 물리적 시계를 무력화시키고, 오직 청자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제3의 시간'을 창조합니다.



3. 타르코프스키 : 시간을 봉인하는 예술

813dfZyVnGL._AC_UF1000,1000_QL80_.jpg 출처 : Amazon.com

러시아의 거장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는 그의 저서 <봉인된 시간(Sculpting in Time)>에서 영화와 음악의 공통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술가는 거대한 대리석 같은 시간 덩어리를 가져와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고 그 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에게 예술이란 흘러가 버리면 사라지는 야속한 시간을 붙잡아, 영원히 반복될 수 있는 형태로 '봉인(Seal)'하는 행위였습니다. 음악가는 악보라는 틀 안에 시간을 가둡니다. 18세기에 바흐가 느꼈던 시간은 악보 속에 봉인되어 있다가, 21세기의 연주자가 첫 음을 켜는 순간 봉인이 해제되며 현재의 시간으로 부활합니다. 음악은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소환하고, 미래의 시간으로 흘려보내는 타임캡슐이자 타임머신입니다.



4. 스트라빈스키 : 존재론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

978-0-674-30301-0-frontcover.jpg 출처 : www.bibliovault.org

20세기 음악의 혁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는 하버드 대학에서의 강연을 엮은 책 <음악의 시학(Poetics of Music)>에서 음악적 시간을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존재론적 시간 (Ontological Time) : 심장 박동이나 호흡처럼 규칙적이고 평온한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음악. (예: 바흐, 모차르트의 고전주의 음악). 이 음악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게 만듭니다.


심리적 시간 (Psychological Time): 감정의 기복에 따라 시간이 불규칙하게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음악. (예: 바그너, 낭만주의, 현대 음악). 이 음악은 우리의 내면을 흔들고, 시간 감각을 왜곡시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의 진정한 기능은 일상의 시간(크로노스)과 음악적 시간 사이의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음악은 무질서하게 흘러가는 우리의 삶에 '리듬'이라는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이 시간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선물합니다.



5. 앙리 베르그송의 '지속(Durée)'

durée-et-simultanéité-henri-bergson-ebook-epub-pdf-kindle.jpg 출처 : www.arvensa.com

이 주제에서 빠질 수 없는 철학자는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입니다. 그는 시간을 시계바늘처럼 뚝뚝 끊어진 단위의 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 즉 '지속(Durée, 뒤레)'으로 보았습니다.


베르그송은 "멜로디를 들을 때 우리는 이전 음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음과 섞여 미래의 음으로 흘러간다고 느낀다"고 했습니다. 음악이야말로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매개체입니다. 음악 속에서 과거(기억), 현재(지각), 미래(기대)는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녹아듭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쪼개진 시간이 아니라, '온전하게 연결된 생명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6. 뇌과학 : 시간 지각의 왜곡 (Time Warping)


철학자들의 통찰은 현대 뇌과학으로도 증명됩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 등의 연구에 따르면, 뇌에서 시간을 인지하는 영역(기저핵, 소뇌)과 음악의 리듬을 처리하는 영역은 겹쳐 있습니다.


동조화 (Entrainment ): 빠른 템포의 음악을 들으면 심박수와 뇌파가 빨라지며, 뇌는 외부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착각합니다. 반대로 느린 음악은 시간을 빠르게 느끼게 합니다.


몰입과 시간 삭제 : 음악이 주는 정서적 몰입은 전두엽의 시간 감시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쇼핑몰에서 배경음악(BGM)을 트는 이유는 고객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음악은 뇌의 시계를 조작하는 해킹 도구입니다.



7. 페르마타(Fermata) : 죽음을 유예하는 쉼표

Urlinie_in_G_with_fermata.png 출처 : 위키피디어 '늘임표'

음악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언제일까요? 엄청난 굉음이 울릴 때가 아닙니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허공에 멈추고, 모든 악기가 소리를 멈춘 채 긴장을 유지하는 '페르마타(Fermata, 늘임표)'의 순간입니다.


악보 상으로는 단순한 쉼표지만, 그 순간 관객들의 숨소리조차 멈춥니다. 물리적 시간은 흐르지만, 심리적 시간은 완벽하게 정지합니다. 음악은 소리로 시간을 채우기도 하지만, 침묵(Silence)을 통해 시간을 멈추기도 합니다. 그 정적의 순간,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숙명을 잠시 잊고 '영원(Eternity)'을 엿봅니다.



8. 인간은 소리로 시간을 이긴다

ab-x8He9JItX2o-unsplash.jpg 사진 : Unsplash의 AB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끝을 향해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공포입니다. 하지만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동안, 우리는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3분의 음악 속에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고(회상), 미래를 꿈꾸기도 하며(기대), 시간을 멈추기도 합니다(몰입). 음악은 인간이 신에게서 훔쳐온 유일한 '시간 제어 장치'입니다.


우리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비로소 우리가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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