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스스로에게 처방하는 '슬픔이라는 백신'
Sound Essay No.107
비가 오는 날, 우리는 일부러 우울한 발라드를 찾아 듣습니다. 실연을 당했을 때, 신나는 댄스 음악 대신 가슴을 후벼 파는 이별 노래를 들으며 펑펑 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한 일입니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슬픔(Sadness)'은 생존에 불리한 감정입니다. 에너지를 저하시키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 무기력증을 유발하여 포식자에게 잡혀먹힐 확률을 높입니다. 따라서 뇌는 본능적으로 고통과 슬픔을 피하도록 설계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인류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부터 현대의 아델(Adele) 노래까지,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그것을 즐겨왔습니다. 심지어 돈을 지불하고 슬픈 영화를 보러 가서 눈물을 쏟고 나서는 "개운하다"고 말합니다. 철학자들은 이를 '비극의 역설(The Paradox of Tragedy)'이라고 불렀습니다.
도대체 왜 인간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발적으로 소비할까요? 그리고 슬픈 음악은 어떻게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일까요? 그 비밀은 우리의 뇌가 만들어내는 천연 진통제, '호르몬의 속임수'에 숨어 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Ohio State University)의 음악심리학자 데이비드 휴롬(David Huron) 교수는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호르몬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저서 <Sweet Anticipation>을 통해 '프롤락틴(Prolactin)'의 역할을 규명했습니다.
프롤락틴은 주로 임산부가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나오는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극심한 슬픔이나 신체적 고통'을 느낄 때도 분비됩니다. 이 호르몬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통증을 완화하며, 심리적인 위안을 주는 '천연 마취제'이자 '위로 호르몬'입니다.
휴롬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슬픈 음악을 들을 때 뇌는 다음과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 시뮬레이션 : 뇌는 구슬픈 첼로 소리나 애절한 목소리를 들으면, "아, 지금 주인이 슬픈 상황에 처했구나"라고 인식합니다. 일종의 '가상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 호르몬 처방 : 뇌는 주인을 위로하기 위해 즉시 프롤락틴을 분비합니다.
- 현실 확인 (The Trick) : 그런데 실제 현실(Real life)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다친 '진짜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쾌감의 전환 : 진짜 고통은 없는데 진통제(프롤락틴)만 몸에 퍼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프롤락틴이 주는 따뜻한 위로감과 몽롱한 평온함입니다.
즉, 슬픈 음악이 주는 위로는 '뇌를 속여서 얻어내는 생화학적 보상'입니다. 우리가 펑펑 울고 난 뒤 묘한 개운함을 느끼는 이유도 눈물과 함께 분비된 이 호르몬 덕분입니다.
슬픈 음악을 즐기는 또 다른 이유는 '거리두기(Distancing)'에 있습니다. 2013년, 일본 도쿄예술대학의 아이 카와카미(Ai Kawakami) 연구팀은 <Frontiers in Psychology>에 매우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단조(Minor key)의 슬픈 음악을 들려주고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인식된 감정 (Perceived Emotion) : "이 음악이 어떻게 들립니까?" -> 대답: "슬프다, 우울하다, 비극적이다."
느껴진 감정 (Felt Emotion) : "이 음악을 듣고 당신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 대답: "낭만적이다, 감동적이다, 평온하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사람들은 음악이 슬프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인식), 가슴으로는 슬픔 대신 '낭만'과 '감동'을 느꼈습니다(체감).
카와카미 박사는 이를 '대리 감정(Vicarious Emotion)'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현실의 슬픔은 나를 위협하는 '직접적 위협'이지만, 음악 속의 슬픔은 안전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타인의 슬픔' 혹은 '예술적 오브제'입니다. 마치 동물원에서 사자를 볼 때는 공포 대신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안전한 곳에 있다는 안도감 속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관조'하고 '음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학적 발견들은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Poetics)>에서 주장했던 '카타르시스(Catharsis)'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카타르시스는 원래 의학 용어로 '배설' 혹은 '정화'를 뜻합니다. 몸속의 나쁜 물질을 씻어낸다는 의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비극을 보며 두려움과 연민을 느끼고, 그 감정을 극한까지 터뜨림으로써 마음속의 찌꺼기를 씻어낸다고 보았습니다. 슬픔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안전한 통로를 통해 '능동적으로 소비'해 버리는 것. 슬픈 음악은 우리 안에 고여 썩어가는 우울감을 밖으로 퍼내 주는 '감정의 펌프' 역할을 합니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음악은 '사회적 결속(Social Bonding)'의 도구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인간이 슬픈 노래를 함께 부르거나 들을 때, 뇌에서 엔도르핀(Endorphin)과 옥시토신(Oxytocin)이 분비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내가 실연당했을 때 이별 노래를 듣는 것은, 그 가수의 목소리를 통해 "나만 이렇게 아픈 게 아니구나"라는 동질감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나의 고통이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경험임을 깨닫는 순간 고립감은 사라집니다. 슬픈 음악은 보이지 않는 손을 내밀어, 고통 속에 혼자 있는 우리의 어깨를 감싸 안아줍니다. 이것은 100마디의 위로의 말보다 훨씬 강력한 '공감의 힘'입니다.
행복한 음악은 우리를 춤추게 하지만, 슬픈 음악은 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슬픔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내면으로 침잠하게 만들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시간'을 선물합니다.
어쩌면 슬픈 음악을 듣는 행위는 '마음의 예방접종'일지도 모릅니다. 안전한 상태에서 슬픔을 미리 시뮬레이션하고(Kawakami의 연구), 호르몬을 통해 면역력을 키움으로써(Huron의 연구), 언젠가 닥쳐올 진짜 비극을 견뎌낼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울할 때 슬픈 음악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 아니라, 뇌가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보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현명한 신호입니다.
오늘 당신을 울게 만든 그 노래는, 당신을 더 슬프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실컷 울고 난 뒤, 다시 웃게 만들기 위해 찾아온 '가장 아름다운 처방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