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빗소리는 비처럼 들리지 않는다

폴리(Foley)와 시뮬라시옹

by JUNSE

Sound Essay No.114

진짜 빗소리는 비처럼 들리지 않는다 : 폴리(Foley)와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 왜 우리는 가짜 소리를 더 진실하게 느끼는가


1. 베이컨 굽는 소리와 빗소리의 착각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주인공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창가에 서 있습니다. "후두두둑-" 하며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선명하게 들립니다. 관객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비의 차가움과 축축함을 생생하게 느낍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렇습니다. 그 소리는 물방울 소리가 아닙니다. 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가 스튜디오에서 '베이컨을 굽는 소리'를 녹음했거나, '마른 쌀알을 철판에 떨어뜨린 소리'일 확률이 높습니다.


만약 사운드 디자이너가 밖으로 나가 '진짜 빗소리'를 녹음해서 영화에 넣었다면 어땠을까요? 관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지직거리는 잡음(White Noise) 같은데?"


여기서 사운드 디자인의 가장 거대한 역설이 발생합니다. "진짜(Real)는 가짜처럼 들리고, 가짜(Fake)가 진짜처럼 들린다." 우리의 귀는 이미 현실의 소리가 아니라, 미디어가 학습시킨 '과장된 소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2. 잭 폴리 : 거짓말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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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레딧에 항상 등장하는 '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라는 직업명은 1920년대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전설적인 인물 잭 폴리(Jack Foley)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무성 영화가 유성 영화로 넘어가던 시절, 현장 녹음 기술은 조악했습니다. 배우의 대사는 들렸지만, 발자국 소리나 옷깃 스치는 소리는 녹음되지 않았습니다.


잭 폴리는 스크린을 보며 싱크(Sync)에 맞춰 직접 소리를 만들어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말발굽 소리 : 반쪽짜리 코코넛 껍질을 모래 위에 두드려서 만듭니다. (진짜 말발굽 소리보다 더 경쾌합니다.)


칼을 뽑는 소리 : 실제 금속 칼은 "스릉-" 하는 맑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냥 둔탁하게 긁히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폴리 아티스트들은 두 개의 금속을 마찰시켜 '우리가 상상하는' 그 날카로운 소리를 창조합니다.


주먹으로 때리는 소리 : 실제 타격음은 "퍽" 소리가 작습니다. 영화에서는 가죽 재킷을 채찍으로 내리쳐서 뼈가 부서질 듯한 과장된 소리를 만듭니다.


잭 폴리는 깨달았습니다. 관객이 원하는 것은 '사실(Fact)'이 아니라 '그럴듯함(Verisimilitude)'이라는 것을. 사운드 디자인은 소리를 기록(Recording)하는 작업이 아니라, 소리를 연기(Acting)하는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3. 장 보드리야르와 시뮬라크르(Simulacre)

image.png 출처 : revisesociology.com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철학적 틀을 제공합니다. 바로 '시뮬라시옹(Simulation)' 이론입니다.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가 '시뮬라크르(Simulacre, 원본 없는 복제)'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복제물이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힘을 발휘하는 상태를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파생실재)'라고 불렀습니다.


영화 속 총소리를 생각해 봅시다. 실제 권총 소리는 화약이 터지는 "빵!" 소리라기보다, 고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음에 가깝습니다. 잔향(Reverb)도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매트릭스>나 <존 윅>에서 들었던, 대포처럼 웅장하고 묵직한 베이스가 깔린 총소리("쿠-쾅!")를 '진짜 총소리'라고 믿습니다.


이제 관객들은 사격장에 가서 실제 총소리를 들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어? 소리가 왜 이래? 가짜 같아. 영화랑 다르네." 가짜(영화 사운드)가 진짜(현실 사운드)를 밀어내고, 진실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지도는 영토를 대체했습니다." 우리는 사운드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낸 '청각적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4. 기호학적 약속 : 소리는 언어다


왜 우리는 이런 과장된 소리를 리얼하다고 느낄까요? 소리는 단순한 물리적 진동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호(Sign)'이기 때문입니다.


- 독수리 소리 : 영화에 독수리가 나오면 항상 "피이잉-" 하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사실 그건 독수리 소리가 아닙니다. '붉은꼬리말똥가리(Red-tailed Hawk)'의 소리입니다. 진짜 독수리(대머리독수리)는 삑삑거리는 귀여운 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헐리우드는 "독수리라면 용맹한 소리를 내야 한다"는 기호를 만들기 위해 말똥가리의 소리를 독수리 영상에 덮어씌웠습니다.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은 말똥가리의 소리를 독수리의 소리로 착각합니다.


사운드 디자인은 이 '기호학적 약속'을 수행하는 과정입니다. 우주는 진공이라 소리가 없지만, <스타워즈>의 우주선은 웅장한 엔진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것이 관객과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는 물리학자가 아니라, 이 기호들의 문법을 다루는 '언어학자'에 가깝습니다.



5. 불쾌한 골짜기와 ASMR : 리얼리즘의 역습

image.png 출처 : hmri.org.au

하지만 최근에는 흥미로운 반작용도 나타납니다. 지나치게 가공된(Over-produced) 할리우드 사운드에 피로감을 느낀 대중들이, 거칠지만 생생한 '날것의 소리'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튜브의 ASMR이나 브이로그(Vlog)가 대표적입니다. 전문 장비로 다듬은 매끈한 소리가 아니라, 바람 소리가 섞이고 마이크가 옷깃에 스치는 잡음이 들어간 소리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진정성(Authenticity)'을 느낍니다.


너무 완벽하게 세팅된 가짜 소리는 이제 '청각적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를 유발합니다. 4K 고화질 시대의 관객들은 시각적으로 너무나 리얼한 화면을 보고 있기 때문에, 사운드 역시 인위적인 과장보다는 다큐멘터리적인 건조함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덩케르크>에서 보여준 건조하고 날카로운 총소리가 그 예입니다. 하이퍼리얼리티의 시대에 다시 '원본'을 그리워하는 향수가 시작된 것입니다.



6. 예술은 진실을 비추는 거짓말이다

image.png 출처 : tommarch.com

파블로 피카소는 "예술은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거짓말(Art is a lie that makes us realize truth)"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운드 디자인의 본질도 이와 같습니다.


폴리 아티스트가 베이컨 굽는 소리로 빗소리를 만드는 것은, 관객을 속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관객이 그 장면에서 느껴야 할 '비의 정서(차갑고, 쓸쓸하고, 축축한)'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입니다.


진짜 빗소리는 그 감정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가짜 같은 소리를 써야 가장 진짜 같은 감정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운드 디자인이 가진 마법이자, 예술이 현실을 뛰어넘는 방식입니다.


다음에 영화를 볼 때는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당신이 듣고 있는 그 리얼한 발자국 소리 뒤에, 땀 흘리며 낡은 구두를 손에 쥐고 모래판을 두드리고 있는 폴리 아티스트의 열정이 숨어 있음을.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재창조'하는 창조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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