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노선마다 다른 '시그니처 사운드'가 있다면?

공공 교통의 청각적 정체성 디자인

by JUNSE

Sound Essay No.116

지하철 노선마다 다른 '시그니처 사운드'가 있다면?

공공 교통의 청각적 정체성 디자인

image.png 출처 : 위키백과 '서울 지하철 2호선'

우리는 소리로 장소를 기억한다


눈을 감고 상상해보세요. 지하철 2호선 출입문이 닫히기 직전의 경고음. 9호선의 빠른 가속 소리. 1호선의 묵직한 진동음. 같은 '지하철'이라는 공간이지만, 각 노선은 저마다 다른 소리 풍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차이는 대부분 우연의 산물입니다. 차량 제조사가 다르고, 도입 시기가 다르고, 노선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부산물일 뿐,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청각적 정체성'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지하철 노선마다 고유한 '시그니처 사운드'가 있다면 어떨까요? 2호선에 탔을 때는 특유의 멜로디가, 9호선에 탔을 때는 또 다른 음악적 테마가 우리를 맞이한다면? 단순히 '예쁜 소리'를 넘어, 그 소리가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방향감각과 정서적 안정감, 심지어 소속감까지 줄 수 있다면?


이 글은 도쿄 지하철의 혁신적인 음향 시스템을 살펴보고, 서울의 지하철이 어떻게 '청각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지 상상해봅니다.



도쿄의 발견 : 역마다 다른 '출발 멜로디'

스크린샷 2026-02-09 오후 5.52.36.png 출처 : jp.mercari.com '발차멜로디'가 담긴 CD

도쿄의 지하철과 JR선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험했을 겁니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 각 역마다 다른 짧은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것을. 이를 일본에서는 '발차 멜로디(発車メロディー, Hassha Melody)'라고 부릅니다.


이 시스템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89년 JR 신주쿠역입니다. 당초 목적은 매우 실용적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어느 플랫폼에서 어느 방향 열차가 출발하는지 소리로 구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멜로디들은 단순한 '안내'를 넘어 도쿄라는 도시의 청각적 아이덴티티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부야역의 발차 멜로디는 경쾌하고 젊은 느낌입니다. 도쿄의 젊은이 문화 중심지라는 이미지에 맞춰 디자인되었죠. 반면 황거(皇居) 인근역들은 전통적이고 차분한 선율을 사용합니다.


더 흥미로운 건 지역 주민들이 이 소리에 정서적 애착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오랫동안 같은 역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그 역의 발차 멜로디는 '집으로 가는 길'의 신호이자, '일상의 리듬'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한 역의 멜로디를 변경하려 했을 때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소리는 이미 그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것이죠.



왜 '시각적 정체성'만 있고 '청각적 정체성'은 없을까?


우리는 브랜드나 공간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시각적 요소에만 집중합니다. 지하철 노선도 마찬가지입니다. 2호선은 초록색, 3호선은 주황색, 9호선은 금색... 우리는 색으로 노선을 구분하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지하철을 이용하는 많은 순간,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 않습니다. 피곤해서 눈을 감고 있거나, 스마트폰을 보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죠. 이때 우리를 안내하는 건 시각이 아니라 청각입니다.


역 안내 방송, 문 닫히는 경고음, 열차 진동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 소리들을 통해 '지금 어디쯤 왔구나', '곧 내려야겠다'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 소리들은 대부분 일관성 없이, 기능적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합니다.


만약 각 노선이 고유한 '음악적 테마'를 가진다면?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모든 승객이 소리만으로도 지금 어느 노선을 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서울 지하철의 '사운드 정체성' 상상하기


그렇다면 서울의 각 지하철 노선은 어떤 소리를 가질 수 있을까요? 각 노선의 역사와 특성, 그리고 지나가는 지역의 정체성을 소리로 번역해보는 상상을 해봅시다.


2호선 - 서울의 순환 리듬

서울을 한 바퀴 도는 순환선. 끝없이 돌고 도는 움직임. 미니멀하면서도 반복적인 루프 패턴의 음악은 어떨까요? Steve Reich의 미니멀 음악처럼 짧은 패턴이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순환하는 느낌. 각 환승역(신도림, 강남, 잠실, 홍대)에서 살짝씩 변주되어 '순환 속의 변화'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9호선 - 속도와 현대성

서울에서 가장 빠른 급행 노선. 강남과 여의도를 관통하는 비즈니스 라인. 전자음 기반의 미래지향적 사운드가 어울립니다. 급행역에서는 빠른 템포의 음악이, 완행역에서는 조금 느린 버전이 재생되어 '속도의 차이'를 청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겠죠.


1호선 - 역사와 전통

한국 최초의 지하철 노선. 서울을 넘어 인천과 수원까지 이어지는 광역선. 전통 악기(해금, 대금)의 현대적 재해석 음악은 어떨까요? 서울역과 같은 중심 역에서는 웅장하게, 외곽으로 갈수록 서정적으로 변하며 '도심에서 외곽으로의 여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3호선 - 서울의 세로축

강북에서 강남까지 서울을 세로로 가르는 노선. 오금동에서 대화까지, 서울의 다양한 얼굴을 지나갑니다. 다양한 악기가 어우러지는 앙상블 형태의 음악으로 '다양성 속의 조화'를 표현할 수 있겠죠.


이런 식으로 각 노선은 자신만의 '음악적 DNA'를 갖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한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니라, 기능적 가치와 정서적 가치를 동시에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출퇴근 스트레스를 줄이는 소리


서울 시민들의 평균 출퇴근 시간은 약 1시간이 넘습니다. 하루 2시간 이상을 지하철에서 보내는 셈이죠. 이 시간을 단순히 '이동'의 시간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쾌적하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연구에 따르면 예측 가능한 청각 환경은 스트레스를 줄여줍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노선을 타는 통근자들에게 익숙한 발차 멜로디는 일종의 '청각적 랜드마크'가 됩니다. "아, 이 소리가 나왔으니 곧 내 역이구나"라는 안정감을 주는 것이죠.


또한 각 역의 고유한 소리는 '무의식적 안내 시스템'으로 작동합니다. 스마트폰에 빠져있거나 졸고 있어도, 귀는 계속 듣고 있으니까요. 내릴 역이 가까워지면 그 역의 특유한 멜로디가 자연스럽게 우리를 깨웁니다.



도시의 청각적 아이덴티티 구축하기

robert-tudor--8x6Ffud7Bk-unsplash.jpg 사진 : Unsplash의 Robert Tudor

런던의 지하철은 "Mind the gap" 안내 방송으로 유명합니다. 뉴욕 지하철은 특유의 거칠고 소란스러운 소리 풍경으로. 이것들은 모두 그 도시만의 '소리 정체성'입니다.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노선의 시그니처 사운드는 단순한 편의 기능을 넘어, 서울이라는 도시의 청각적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서울을 떠날 때, 남산타워나 경복궁의 이미지와 함께 '2호선의 그 멜로디'를 기억한다면? 타국에서 우연히 그 소리를 듣고 서울에서의 시간을 떠올린다면? 소리는 시각보다 더 강력하게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소리로 그리는 도시의 지도


정기용 건축가가 "건축은 사람들의 삶을 조직하는 일"이라고 했듯이, 사운드 디자인 역시 도시인의 삶을 조직하는 일입니다.


지하철 노선의 시그니처 사운드는 :

시각장애인에게는 명확한 길잡이가 되고


외국인에게는 직관적인 안내가 되고


통근자에게는 일상의 리듬이 되고


모든 시민에게는 도시에 대한 애착을 만듭니다


우리는 이미 색으로 노선을 구분하고, 번호로 역을 기억합니다. 이제 여기에 소리라는 차원을 하나 더해보는 건 어떨까요?


시각, 촉각에 이어 청각까지. 도시를 경험하는 감각의 층위가 하나씩 더해질 때, 서울은 단순히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호흡하는 생명체'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다음번 지하철을 탈 때, 잠시 이어폰을 빼고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세요. 지금은 무작위로 들리는 그 소리들이, 언젠가 당신에게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친근한 멜로디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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