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을 통해 브랜드의 철학을 각인시키는 감각 디자인의 힘
Sound Essay No.33
길을 걷다 이솝(Aesop) 매장을 마주친 경험이 있으신가요? 굳이 매장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쳐다보게 됩니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 있든 결코 똑같은 법이 없는 독특한 건축 디자인, 창 안으로 보이는 실험실처럼 정갈하게 놓인 호박색 병들, 그리고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아늑하고도 낯선 향기까지. 이솝의 공간은 그저 물건을 파는 상점을 넘어, 하나의 잘 만들어진 예술 작품처럼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우리는 왜 이솝의 공간을 유독 잊지 못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감각 브랜딩'의 대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후각적인 특별함, 어느 한 가지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눈에 보이는 것과 코로 맡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그리고 귀로 듣는 모든 감각을 세심하게 조율하여 하나의 완벽한 '브랜드 경험'이라는 교향곡을 연주합니다.
이 글은 그 교향곡 속에서, 종종 우리가 놓치기 쉬운 '청각'이라는 악기가 얼마나 중요하고 섬세한 역할을 수행하는지 탐구해보려 합니다. 이솝의 공간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소리'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솝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가 가장 먼저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의외의 '고요함'입니다. 정신없이 최신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점원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공간을 채우는 대부분의 화장품 가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죠.
다른 감각을 위한 무대: 이솝의 사운드 디자인에서 소리의 첫 번째 역할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주인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고요함은 이솝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향기'가 온전히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근사한 무대를 만들어줍니다. 시끄러운 소음이 우리의 미각을 둔하게 만들 듯, 소란스러운 음악은 우리의 후각을 산만하게 만듭니다. 이솝은 청각을 최소화함으로써, 우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 독특한 아로마에 온전히 집중하고, 그 향기를 더 깊이 음미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음악: 이솝 매장의 배경음악은 결코 우리의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최신 댄스곡이나 팝송을 들을 수 없습니다. 대신, 미니멀한 현대음악, 차분한 재즈, 혹은 잔잔한 앰비언트 사운드가 아주 낮은 볼륨으로 공간을 채웁니다. 이러한 음악은 우리의 발걸음을 서두르게 하는 대신, 오히려 천천히 공간을 거닐며 제품 하나하나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마치 미술관이나 도서관에 온 것처럼 말이죠. 소리는 공간의 '시간적 속도'를 디자인하고, 고객이 브랜드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합니다.
자세히 귀 기울여보면, 이솝의 소리는 단순히 조용한 것을 넘어, 다른 감각들과 아주 섬세하게 '결'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료의 질감과 소리의 질감: 이솝의 인테리어는 나무, 돌, 황동, 흙과 같은 자연적이고 거친 질감의 재료를 즐겨 사용합니다. 이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자연친화적인 철학을 시각적, 촉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그리고 이때 흐르는 음악 역시, 인공적인 전자음보다는 실제 악기로 연주된 어쿠스틱 사운드나, 따뜻한 질감의 아날로그 신시사이저 사운드일 경우가 많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나무의 결'과 손으로 만져지는 '돌의 감촉'이, 귀로 들리는 '현악기의 울림'이나 '아날로그 노이즈의 질감'과 만나 하나의 통일된 감각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 차갑고 날카로운 디지털 사운드가 흘러나온다면, 이 모든 감각의 조화는 순식간에 깨져버릴 겁니다.
물의 소리가 주는 위로: 대부분의 이솝 매장에는 고객이 직접 제품을 사용해볼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싱크'가 있습니다. 이때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단순히 기능적인 소음이 아닙니다. 물소리는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안정감과 깨끗함, 그리고 자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강력한 '긍정의 소리'입니다. 고객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듣는 이 부드러운 물소리는, 제품의 향기, 그리고 손에 남는 촉촉한 감촉과 완벽하게 어우러져, '씻어내는 행위'를 하나의 평화로운 '의식(Ritual)'처럼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이솝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브랜드 철학은 무엇일까요? '균형 잡힌 삶', '사려 깊은 디자인', '지적인 탐구' 같은 가치들일 겁니다. 이 추상적인 가치들은 바로 이 감각의 교향곡을 통해 우리에게 각인됩니다.
시각 (도서관): 도서관처럼 정갈하게 정렬된 제품들은 '지적인 탐구'를 암시합니다.
후각 (정원/실험실): 흙과 식물, 허브의 향기는 '자연과의 조화'와 '과학적 신뢰'를 느끼게 합니다.
촉각 (의식): 싱크에서 손을 씻는 행위는 '차분하고 균형 잡힌 삶의 태도'를 경험하게 합니다.
청각 (미술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는 고요하고 세련된 사운드스케이프는, 이 공간이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높은 안목으로 모든 것이 '잘 선별된(Curated)' 미술관과도 같은 공간임을 느끼게 합니다.
결국 이솝의 소리는, 다른 모든 감각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조용히 확인하고 완성하는 '마지막 인장'과도 같습니다. 각각의 감각들이 따로따로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라고 하나의 목소리로 합창하게 만드는 지휘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솝의 공간을 잊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제품을 구경한 것이 아니라, 눈과 코와 손과 귀로, 하나의 잘 짜인 철학을 온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향기는 좋았지만 음악이 시끄러웠거나, 인테리어는 멋졌지만 향이 없었다면, 이솝의 경험은 지금처럼 우리 기억 속에 오래 남지 못했을 겁니다.
그 모든 감각의 경험을 하나의 단단한 끈으로 묶어 우리 기억 속에 조용히 각인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 그것이 바로 이솝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소리'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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