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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맛의 마지막 시즈닝이다

최고의 셰프들이 청각을 통해 미식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법

by JUNSE

Sound Essay No.32

소리는 맛의 마지막 시즈닝이다

최고의 셰프들이 청각을 통해 미식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법


사진: Unsplash의Martin Widenka


최고의 요리는 접시 위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최고의 셰프는 접시 위에만 요리를 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색의 조화, 섬세한 플레이팅, 코를 자극하는 향기. 우리는 눈과 코로 먼저 음식을 맛보며, 완벽한 미식 경험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 경험을 완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재료가 접시 위가 아닌, 바로 우리 '귀'를 통해 전달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단순히 혀로만 맛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을 채우는 음악, 사람들의 나지막한 대화 소리,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심지어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까지. 이 모든 청각적 정보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음식의 맛을 바꾸고, 그날의 식사 전체를 지휘하는 '보이지 않는 시즈닝' 역할을 합니다.


이 글은 '소리'라는 이 신비로운 시즈닝의 비밀을 탐구해보려 합니다. 최고의 셰프와 레스토랑들이 어떻게 청각을 디자인하여 음식의 맛을 극대화하고, 우리를 평범한 식사에서 잊지 못할 미식의 경험으로 이끄는지. 그 놀라운 '소리의 레시피'를 함께 엿보고자 합니다.



'소닉 시즈닝' - 맛을 조종하는 소리의 과학

출처 : cordonbleu.edu 'Free Industry SeminarGastrophysics'


최근 몇 년 사이, '미식 물리학(Gastrophysics)'이라는 흥미로운 분야의 학자들은 소리가 실제로 우리의 미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닉 시즈닝(Sonic Seasoning, 소리 양념)'이라는 개념입니다.


달콤한 피아노, 쌉쌀한 첼로

옥스퍼드 대학의 찰스 스펜스 교수팀의 실험은 아주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줍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같은 음식을 맛보게 하면서, 배경에 각기 다른 높낮이의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놀랍게도, 높고 맑은 피아노 소리나 풍경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은 음식을 실제보다 약 10% 더 '달콤하게' 느꼈습니다. 반대로, 낮고 묵직한 첼로나 금관악기 소리를 들을 때는 음식의 '쌉쌀한' 풍미를 더 강하게 느꼈다고 합니다. 뇌는 귀로 들어온 소리의 정보를 미각 정보와 합쳐, "아, 이 음식은 달콤하구나!" 혹은 "이 커피는 풍미가 깊군"이라고 유쾌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소리로 맛보는 초콜릿

이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예시가 바로 '초콜릿과 사운드 페어링'입니다. 똑같은 다크 초콜릿 조각을 두 번 맛본다고 상상해보세요. 첫 번째는 부드럽고 서정적인 고음역대의 플루트 음악을 들으며 먹습니다. 아마 초콜릿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크리미하고 달콤한 풍미가 강조될 것입니다. 잠시 후, 두 번째 조각은 낮고 웅장한 첼로 연주곡을 들으며 맛봅니다. 이번에는 초콜릿의 쌉쌀한 카카오 향과 깊은 풍미가 훨씬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셰프들은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하여, 설탕을 더 넣는 대신 '달콤한 소리'를, 쓴맛의 재료를 더하는 대신 '쌉쌀한 소리'를 레시피에 추가합니다.



셰프들의 걸작 - 소리로 떠나는 미식 여행


몇몇 선구적인 셰프들은 이 '소리의 레시피'를 단순한 실험을 넘어, 하나의 완벽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헤스턴 블루멘탈의 '바다의 소리'
분자요리의 대가, 헤스턴 블루멘탈의 전설적인 레스토랑 '더 팻 덕(The Fat Duck)'에는 '바다의 소리(Sound of the Sea)'라는 메뉴가 있습니다. 이 요리를 주문하면, 굴과 해초 거품 등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해산물 요리와 함께, 커다란 조개껍데기에 담긴 아이팟이 함께 서빙됩니다. 손님은 조개껍데기에 귀를 대고, 아이팟에서 흘러나오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를 들으며 음식을 맛보게 됩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이 소리를 들으며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소리 없이 먹었을 때보다 음식이 훨씬 더 '신선하고', '짭짤하며', '바다의 풍미'가 강렬하게 느껴진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파도 소리는 우리 뇌 속에 잠들어 있던 '바다'에 대한 모든 기억과 감각(짠맛, 시원함, 신선함)을 깨우는 강력한 스위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헤스턴 블루멘탈은 단순히 해산물을 요리한 것이 아니라, '바다'라는 하나의 완벽한 경험을 디자인하여 접시 위에 올린 셈입니다.

출처 : thebigfatundertaking.wordpress.com '57. Sound of the Sea'


서브리모션의 '감각 몰입형' 다이닝
스페인 이비자 섬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 중 하나인 '서브리모션(Sublimotion)'은 이 개념을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이곳의 다이닝 룸은 벽 전체가 360도 스크린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감각 몰입형' 공간입니다. 예를 들어, 해산물 요리가 나올 때는 식사 공간 전체가 푸른 바닷속으로 변하고, 실제 바닷속에서 들을 법한 물소리와 공기 방울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시골 농장을 테마로 한 요리가 나올 때는 벽면이 푸른 초원으로 바뀌고,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심지어 흙냄새까지 함께 제공됩니다. 이때의 소리는 단순히 배경음악이 아니라, 시각, 후각, 심지어 온도 변화와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손님을 요리의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순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곳에서 식사는 미각을 넘어선, 한 편의 완벽하게 연출된 '체험극'이 됩니다.

출처 : https://veebrant.com/sublimotion-ibiza/


소리 없는 레시피 - 공간의 음향이 맛을 결정한다

사진: Unsplash의Jahanzeb Ahsan


특정한 소리뿐만 아니라, 레스토랑 공간 자체가 가진 '음향적 특징' 역시 음식 맛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그러나 보이지 않는 레시피입니다.


맛의 가장 큰 적, '소음': 혹시 유난히 시끄러운 식당에서 먹은 음식이 평소보다 맛없게 느껴진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것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주변 소음이 일정 수준(약 85dB 이상)을 넘어서면 우리의 미각은 실제로 둔해진다고 합니다. 특히 단맛과 짠맛을 느끼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죠. 뇌가 시끄러운 소리를 처리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느라, 혀가 보내는 섬세한 맛의 신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요함을 디자인하는 이유: 최고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이 값비싼 카펫을 깔고, 흡음재를 사용하며, 테이블 간의 간격을 넓게 두는 이유는 단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바로 이 '소음'을 통제하여, 손님들이 온전히 음식의 맛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청각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심지어 나이프와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마저 아름답게 들리도록 공간의 울림을 디자인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처럼 잘 관리된 고요함은, 셰프가 선보이는 섬세한 맛의 향연을 위한 가장 근사한 '음향적 접시'가 되어줍니다.



당신의 귀를 위한 애피타이저


사진: Unsplash의Harrison Chang


이제 우리는 압니다. 미식의 경험이란 단순히 혀끝에서 벌어지는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셰프가 세심하게 조율한 소리의 시즈닝, 공간의 울림, 그리고 배경음악의 무드까지, 우리의 모든 감각이 함께 참여하여 완성하는 한 편의 교향곡과도 같습니다.


소리는 셰프가 음식의 맛을 완성하기 위해 뿌리는 마지막 시즈닝이자, 우리가 경험할 맛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친절한 '소리 소믈리에'입니다. 다음번에 멋진 레스토랑에 가신다면,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잠시 눈을 감고 그 공간의 '소리'를 먼저 맛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당신이 주문한 요리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재료는, 바로 당신의 귀를 통해 가장 먼저 서빙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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