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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베티카와 미니멀 테크노는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

타이포그래피 원칙으로 분석하는 사운드 디자인의 비밀

by JUNSE


Sound Essay No.31

헬베티카와 미니멀 테크노는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

타이포그래피 원칙으로 분석하는 사운드 디자인의 비밀

1_4qjl6L06kwNoP3eofs8UnQ.jpg 출처 : https://medium.com/@designsieun/helvetica-typeface-study
p0hlbvqc.jpg 출처 : bbc.com



글꼴과 음악 사이의 기묘한 공통점


스위스에서 태어난 글꼴 '헬베티카(Helvetica)'와 독일 베를린의 클럽에서 울려 퍼지는 '미니멀 테크노(Minimal Techno)'. 이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하나는 차갑고 이성적인 그래픽 디자인의 상징이고, 다른 하나는 뜨거운 밤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음악인데 말이죠.


언뜻 보기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이 두 세계는, 사실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습니다. 둘 다 불필요한 장식을 모두 걷어내고,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의 관계와 그 사이의 '여백'을 통해 최고의 기능과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말이죠.


이 글은 타이포그래피라는 익숙한 렌즈를 통해, 미니멀 테크노라는 음악, 나아가 좋은 사운드 디자인의 본질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조금은 독특한 시도입니다. 헬베티카의 디자인 원칙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우리는 좋은 소리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비밀 하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그리드 위에서 시작된다 - 질서와 안정감


rm218batch4-aum-08.jpg 출처 : freepik.com


좋은 타이포그래피의 기본은 보이지 않는 '그리드'에서 시작됩니다. 글자들이 보이지 않는 기준선(Baseline)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을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고 글의 내용을 편안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습니다. 헬베티카는 이 질서의 미학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서체입니다. 모든 글자의 굵기와 형태, 간격이 엄격한 규칙 안에서 조율되어 있죠.


미니멀 테크노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는 '쿵, 쿵, 쿵, 쿵' 하고 일정하게 찍히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4박자의 킥 드럼이라는 강력한 그리드가 존재합니다. 이 단단한 기둥과도 같은 킥 드럼이 음악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고, 듣는 이에게 안정적인 예측 가능성을 선물합니다.


바로 이 견고한 '소리의 그리드'가 있기에, 우리는 그 위에서 펼쳐지는 다른 소리들의 미세한 변화와 움직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엇박으로 들어오는 하이햇 소리, 불규칙하게 등장하는 신시사이저의 짧은 소리 조각들은, 마치 헬베티카의 정갈한 글자들처럼, 각자의 역할과 위치를 명확히 드러내며 혼란이 아닌 '긴장감'과 '재미'를 만들어냅니다.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다면 그저 소음일 뿐이지만, 단단한 질서 위에 놓인 약간의 불규칙성은 우리를 춤추게 하는 '그루브'가 됩니다.



여백의 미학 - 소리가 숨 쉴 공간을 디자인하라


nguyen-minh-z6LjXSdEbD8-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Nguyen Minh


아마추어 디자이너와 전문 디자이너의 가장 큰 차이는 '여백'을 다루는 능력에 있습니다. 전문가는 글자 자체만큼이나 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격(커닝), 줄과 줄 사이의 간격(행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보이지 않는 여백이야말로, 글 전체의 가독성과 인상을 결정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사운드 디자인, 특히 미니멀 테크노는 바로 이 '여백의 미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음악입니다. 훌륭한 미니멀 테크노 트랙은 소리로 가득 차 있는 음악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과 공간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음악입니다.


주파수의 커닝(Kerning): 소리의 영역 지켜주기 타이포그래피에서 'a'와 'v'라는 글자를 나란히 놓을 때, 두 글자의 간격을 미세하게 좁혀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을 '커닝'이라고 합니다. 사운드 믹싱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킥 드럼과 베이스는 둘 다 낮은 저음역대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냥 두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뭉개지고 답답한 소리가 납니다. 이때 전문가는 EQ를 사용해 베이스 소리에서 킥 드럼이 울리는 특정 주파수 영역만 살짝 파내어, 킥 드럼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마치 글자의 간격을 조절하듯, 소리의 주파수 간격을 섬세하게 조율하여 각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도록 '주파수의 커닝'을 하는 셈입니다.


리듬의 행간(Leading): 침묵으로 긴장감을 만들다 빽빽하게 글자만 가득한 책은 읽기 힘든 것처럼, 쉴 새 없이 소리가 몰아치는 음악은 우리를 금세 피곤하게 만듭니다. 미니멀 테크노의 진정한 매력은 소리와 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에 있습니다. 킥 드럼이 한두 마디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할 때의 쾌감, 모든 소리가 멈춘 뒤 메아리처럼 멀어지는 신시사이저 소리의 여운. 이 모든 것이 의도적으로 디자인된 '리듬의 행간'입니다. 이 비어있는 시간 덕분에, 우리는 각각의 소리에 더 깊이 집중하게 되고, 다음에 어떤 소리가 나타날지 기대하게 됩니다. 가장 깊은 그루브는 가장 많은 소리가 아니라, 가장 완벽하게 디자인된 침묵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기능이 형태를 결정한다 - '투명함'의 아름다움


헬베티카는 "나를 봐주세요!"라고 외치는 글꼴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지우고, 담고 있는 '정보'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투명한 그릇'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 기능적인 완벽함이 바로 헬베티카의 아름다움이죠.


artem-bryzgalov-xhEbZbCI7sI-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Artem Bryzgalov


미니멀 테크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클럽이라는 공간에서, 이 음악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람들을 춤추게 하고, 일정한 상태의 몰입감(Trance)을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화려한 멜로디나 극적인 구성은 오히려 이 몰입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니멀 테크노는 과시적인 기교나 감정 표현을 덜어내고, 오직 몸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리듬과 질감의 변화에 집중합니다. 헬베티카처럼, 음악 자체가 주인공이 되기보다, 듣는 이의 '경험'(춤, 몰입)을 위한 가장 완벽한 배경이 되어주는 것을 선택한 셈입니다.



비어있는 곳을 디자인하는 감각


michael-mckay-E5PsbFULPYo-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Michael McKay


헬베티카와 미니멀 테크노. 전혀 다른 두 세계는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가득 채우는 것만이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남겨진 요소들 사이의 관계와 여백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것이야말로 본질에 닿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소리를 만드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소리를 더 추가할까?"를 고민하기 전에, 혹시 "어떤 소리를 덜어내야 할까?"를 먼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내 음악 속 소리들은 서로 숨 쉴 공간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까요? 헬베티카의 디자이너가 글자 사이의 미세한 간격을 들여다보듯, 우리도 소리와 소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가장 세련된 디자인은, 종종 가장 비어있는 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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