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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톰 포드의 시선

패션 디자이너의 감각은 어떻게 사운드트랙을 '연출'하는가?

by JUNSE


Sound Essay No.30

영화감독 톰 포드의 시선

패션 디자이너의 감각은 어떻게 사운드트랙을 '연출'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재단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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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포드의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보통, 완벽하게 재단된 수트, 관능적인 향수, 그리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세련미를 떠올립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자, 자신만의 확고한 미학을 가진 '취향의 설계자'입니다. 그런 그가 영화감독을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영화가 그저 '아름답기만 한' 비주얼의 나열이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물론 그의 영화 <싱글 맨>과 <녹터널 애니멀스>는 예상대로 모든 프레임이 패션 화보처럼 완벽하게 통제된, 숨 막히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천재성은, 그 완벽한 시각적 세계를 완성하는 '소리'의 연출 방식에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최고의 원단을 고르고 섬세하게 재단하여 수트를 만들 듯, 소리의 질감과 음악의 색채, 그리고 침묵의 실루엣까지 직접 디자인합니다.

이 글은 톰 포드라는 희대의 비주얼리스트가 어떻게 자신만의 디자이너적 감각을 통해 소리를 '연출'하는지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그에게 소리는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라는 감각적 경험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소재' 그 자체입니다.



소리의 '색상 보정' - 감정의 채도를 조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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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에게 '색'은 컬렉션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톰 포드는 이 색채에 대한 감각을 영화 속에서 음악을 통해 그대로 구현합니다. 특히 그의 데뷔작 <싱글 맨>은 음악이 어떻게 감정의 '색상 보정'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교과서입니다.


영화는 오랜 연인을 잃고 삶의 모든 의미를 상실한 주인공 '조지'의 하루를 따라갑니다. 그의 절망을 반영하듯, 영화의 세계는 온통 잿빛의 무채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때 흐르는 아벨 코제니오프스키의 음악 역시, 단조로운 피아노 선율이나 쓸쓸한 현악기 소리 몇 가닥으로만 이루어져 있죠. 그런데 조지가 자신의 학생 '케니'와 마주치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예를 들어, 수업 중 케니가 던지는 순수한 질문에 조지가 잠시 매료되는 장면. 카메라는 조지의 얼굴을 천천히 클로즈업하고, 바로 그 순간 세상의 색이 아주 미세하게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회색빛이던 화면에 따뜻한 색온도가 스며드는 바로 그 타이밍에, 미니멀하게 흐르던 음악은 갑자기 풍성하고 화려한 스트링 오케스트라로 만개합니다.


이 연출은 조지가 케니의 푸른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는 장면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세상은 놀랍도록 생생한 총천연색으로 물들고, 음악은 가장 로맨틱하고 장엄한 선율을 터뜨립니다. 음악은 단순히 장면의 분위기를 돋우는 것을 넘어, 시각적인 색채의 변화와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주인공의 내면에서 폭발하는 감정의 '채도'를 청각적으로 증폭시킵니다. 마치 영상 편집 프로그램에서 '채도(Saturation)' 슬라이더를 최대로 끌어올릴 때, 음악의 볼륨과 악기 구성의 '채도' 역시 함께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영화의 또 다른 '컬러 팔레트'인 셈입니다.



소리의 '질감' - 보이지 않는 것을 만지게 하라


최고급 캐시미어와 거친 데님의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패션 디자이너답게, 톰 포드는 영화 속에서 '소리의 질감'을 통해 인물과 공간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 집착에 가까운 재능을 보입니다.


스크린샷 2025-10-13 오후 7.55.16.png 출처 : 유튜브 Screen Theme, A Single Man (2009) - 'Becoming George' scene


<싱글 맨>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보세요. 조지가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는 장면. 우리는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소리만으로 그의 내면을 만지게 됩니다. 완벽하게 다려진 셔츠가 내는 바삭거리는 소리, 은으로 된 커프스링크가 '찰칵'하고 잠기는 작지만 선명한 금속성 소리, 부드러운 실크 넥타이가 매듭지어지는 매끄러운 마찰음, 그리고 잘 닦인 구두가 나무 바닥에 닿는 또렷한 소리까지. 톰 포드는 이 지극히 사소한 소리들을 과장될 정도로 섬세하고 가깝게 들려줍니다. 이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효과음이 아닙니다. 완벽한 표면과 통제된 삶을 통해 내면의 슬픔과 균열을 감추려는 주인공의 강박적인 성격을, 우리는 이 '소리의 감촉'을 통해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녹터널애니멀.jpg 출처 : 유튜브 The Movie Times Tom Ford: NOCTURNAL ANIMALS

<녹터널 애니멀스>에서는 이 질감의 대비가 더욱 극명해집니다. 주인공 '수잔'이 살아가는 LA 상류층의 세계는 차갑고 매끄러운 소리로 가득합니다. 미술관 오프닝 장면에서 와인잔이 부딪히는 날카롭고 투명한 소리, 텅 빈 갤러리 공간을 울리는 하이힐의 인공적인 또각거림, 사람들의 의미 없는 대화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울림은 그녀의 삶이 얼마나 차갑고 공허한지를 청각적으로 증명합니다. 반면, 그녀가 읽는 소설 속 텍사스의 세계는 거칠고 건조하며 끈적거리는 소리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밤의 고속도로에서 가족이 위협당하는 첫 장면, 타이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자갈밭에 파묻히는 거친 마찰음, 낡은 자동차 엔진의 불길한 굉음, 그리고 살갗이 부딪히는 불쾌하고도 생생한 소리들. 톰 포드는 이 두 세계의 다른 '소재감'을 소리를 통해 구현함으로써, 관객이 두 공간의 이질적인 감각을 피부로 느끼게 만듭니다.



소리의 '실루엣' - 침묵을 재단하다


패션 디자인의 완성은 불필요한 모든 것을 덜어낸 '실루엣'에 있습니다. 톰 포드는 이 미니멀리즘의 원칙을 '침묵'이라는 도구를 통해 사운드 디자인에 적용합니다. 그의 영화 속에는 의도적으로 비워진, 하지만 그 어떤 소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요한 순간들이 존재합니다.


녹터널애니멀_02.jpg 출처 : 유튜브 Focus FeaturesNOCTURNAL ANIMALS - 'No Signal Here' Clip - In Select Theaters November 18


<녹터널 애니멀스>의 마지막 장면은 이 '침묵의 연출'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수잔은 전남편 에드워드와의 재회를 위해 완벽하게 차려입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죠. 이때 톰 포드는 관객의 감정을 유도하는 그 어떤 배경음악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레스토랑의 모든 주변 소리에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다른 테이블의 나이프와 포크 소리, 사람들의 희미한 웃음소리, 얼음이 녹아 잔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까지. 이 모든 평범한 소음들이 수잔의 기다림과 대비되며, 그녀의 고독과 굴욕감을 극대화하는 배경이 됩니다. 침묵은 더 이상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수잔의 감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검은색 벨벳 무대가 되는 것입니다. 톰 포드는 소리를 더하는 대신, 침묵을 디자인함으로써 오히려 인물의 감정을 가장 선명하게 조각해냅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재단된 감정의 수트


Tom-Ford-01-690x360.jpg 출처 : https://the-talks.com/interview/tom-ford/


톰 포드는 영화를 만들 때, 패션 디자이너의 눈과 손을 함께 사용합니다. 그는 장면의 질감을 '만지고', 음악의 색채를 '보며', 사운드 전체의 실루엣을 '재단'합니다. 그에게 소리와 음악은 영화가 끝난 뒤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옷을 짓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실과 바늘인 셈입니다.


톰 포드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재단된 '감정의 수트'를 입어보는 경험과도 같습니다. 그 옷의 부드러운 안감, 날카로운 실루엣, 그리고 서늘한 질감은 눈과 귀를 통해 동시에 느껴지며, 우리를 그의 아름답고도 서글픈 세계 속으로 완벽하게 감싸 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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