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이노의 '비스듬한 전략'으로 창의력 길 찾기
Sound Essay No.39
우리 모두 경험하는 순간이죠. 마감은 다가오는데 모니터는 백지, 머릿속은 텅 빈 상태. 분명 어제까진 괜찮았는데, 갑자기 아이디어가 딱 끊기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그 막막함. 이럴 때 우리는 보통 어떻게 하나요? 커피를 더 마시고, 머리를 쥐어짜고, 어떻게든 '정답'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길은 더 보이지 않고 좌절감만 깊어지죠.
여기, 이런 '창작의 변비' 상태에 빠진 우리에게 전혀 다른 처방전을 내미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앰비언트 음악의 대부이자, 데이비드 보위부터 U2까지 수많은 뮤지션들의 혁신을 이끌었던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입니다. 그는 문제가 막혔을 때, 정면으로 돌파하는 대신 오히려 옆길로 새거나 아예 뒤돌아가라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그 속삭임을 담은 비밀스러운 도구가 바로 '비스듬한 전략(Oblique Strategies)' 카드 덱이죠.
이 글은 브라이언 이노가 남긴 이 수상하고도 매력적인 카드들이 어떻게 우리의 굳어버린 생각을 말랑하게 만들고, 막다른 길처럼 보였던 곳에서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지, 그 유쾌한 '딴짓'의 철학을 탐구해보려 합니다.
'비스듬한 전략'은 말 그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선적이고 논리적인 접근 대신, 예상치 못한 '비스듬한' 각도에서 질문을 던지는 짧은 문장들이 적힌 카드 덱입니다. 1970년대 중반, 브라이언 이노와 그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피터 슈미트가 각자 창작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었던 메모들을 모아 탄생했죠.
카드에는 이런 식의, 때로는 시적이고 때로는 황당하기까지 한 지령들이 적혀 있습니다.
"실수를 숨기지 말고 보물처럼 다뤄라 (Honor thy error as a hidden intention)"
"가장 당황스러운 디테일을 강조하라 (Emphasize the flaws)"
"오래된 아이디어를 사용하라 (Use an old idea)"
"네 몸에게 물어보라 (Ask your body)"
"완전히 다른 속도로 작업하라 (Work at a different speed)"
"가장 중요한 것을 맨 마지막에 하라 (Put the most important thing last)"
"정원을 가꿔라 (Gardening not architecture)"
이 카드를 사용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작업이 막혔을 때, 혹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카드 덱에서 한 장을 뽑아 그 지령을 따라보는 것입니다. 물론 카드가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죠. 하지만 바로 그 '혼란'이야말로, 이 전략의 진짜 마법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아니, 작업이 막혔는데 정원을 가꾸라니, 이게 말이 되냐고요? 네, 말이 됩니다. 우리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이 '비스듬한' 접근법이 왜 효과적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습관이라는 이름의 감옥 탈출: 우리가 슬럼프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익숙한 사고방식과 작업 루틴에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뇌는 효율성을 좋아해서, 늘 가던 길로만 가려고 하죠. '비스듬한 전략' 카드는 바로 이 익숙한 길 위에 예고 없이 나타나는 '공사 중' 표지판과 같습니다. 강제로 다른 길을 찾게 만들면서,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풍경과 아이디어를 만나게 해주는 거죠.
제약이 주는 의외의 자유: "하나만 골라 써!", "이 악기 빼고 작업해!" 같은 몇몇 카드들은 우리에게 '제약'을 겁니다. 우리는 보통 제약이 창의성을 억누른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일 때가 많습니다. 아무런 제약 없이 "뭐든 만들어봐!"라고 하면 오히려 막막하지만, "자, 여기 연필 하나랑 종이 한 장만 줄 테니, 이걸로 세상을 놀라게 해봐!"라고 하면 우리의 뇌는 그 한계 안에서 기발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제약은 우리를 더 똑똑하고, 더 절실하게 만듭니다.
실수는 신의 선물?: "실수를 보물처럼 다뤄라"는 카드는 실패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우리는 보통 실수를 하면 좌절하고, 그 부분을 지우거나 숨기려고 하죠. 하지만 이 카드는 말합니다. "잠깐! 그 실수, 자세히 한번 들여다봐. 어쩌면 네가 찾던 답이 바로 거기에 있을지도 몰라." 의도치 않은 노이즈, 잘못 쓴 코드 한 줄, 실수로 덧칠한 물감 자국이 때로는 작품 전체를 뒤흔드는 가장 독창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역설. 실수를 '데이터'이자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순간, 창작은 훨씬 더 자유롭고 즐거운 놀이가 됩니다.
줌 아웃! 다른 렌즈로 보기: "네가 일하는 순서를 봐", "가장 중요한 걸 마지막에 해봐" 같은 카드들은 우리에게 잠시 멈춰서 작업 과정 전체를 '줌 아웃'해서 보라고 권합니다. 우리는 문제 자체에 너무 깊이 빠져들면, 정작 그 문제를 둘러싼 더 큰 그림을 놓치기 쉽습니다. 전혀 다른 순서로 작업해보거나, 시간이나 공간, 혹은 협업하는 방식 같은 '틀' 자체를 바꿔보는 것만으로도 막혔던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리기도 합니다.
자, 그럼 이 마법의 카드 덱을 실제로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카드에 적힌 글자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카드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막힌 당신을 위한 즉석 처방전 (예시):
상황: 몇 시간째 똑같은 멜로디 라인만 맴돌고 있다.
카드: "가장 당황스러운 디테일을 강조하라 (Emphasize the flaws)"
비스듬한 생각: '그래, 이 멜로디에서 내가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뭐지? 아, 저 어색한 음정! 차라리 저 음정을 더 기괴하게 비틀거나 반복해서 곡의 특징으로 만들어 버릴까?'
상황: 사운드 디자인 작업 중인데, 소리가 너무 평범하게 느껴진다.
카드: "정원을 가꿔라 (Gardening not architecture)"
비스듬한 생각: '너무 완벽하게 설계하려고 했나? 건축가가 아니라 정원사처럼 접근해보자. 일단 이것저것 소리 씨앗을 뿌려놓고, 서로 어떻게 자라나고 섞이는지 좀 더 지켜볼까? 통제하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둬 보자.'
상황: 글의 결론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카드: "네 몸에게 물어보라 (Ask your body)"
비스듬한 생각: '음… 일단 컴퓨터 앞에서 벗어나서 좀 걸어볼까? 이 글을 읽을 때 내 몸이 어떤 느낌을 받는지, 답답한지 시원한지, 혹은 그냥 졸린지(?) 한번 느껴보자. 몸이 보내는 신호가 어쩌면 정답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카드 해석에 정답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카드를 뽑는 행위를 통해, 잠시 멈춰서 평소와는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환기'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브라이언 이노의 '비스듬한 전략'은 우리에게 마법 지팡이를 쥐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지만 잊고 있었던 능력, 즉 '다르게 생각하는 힘'을 일깨워줍니다. 창의성이란 A에서 B로 가는 가장 빠른 직선 경로를 찾는 능력이 아니라,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그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보물을 발견하는 탐험가의 태도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다음번에 또다시 창작의 벽 앞에서 좌절감이 밀려올 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당신만의 '비스듬한 질문'을 던져보는 건 어떨까요? "만약 이 문제를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설명한다면?", "이걸 거꾸로 재생하면 어떨까?", "오늘 점심 메뉴에서 영감을 얻어볼까?" 처럼 말이죠.
가장 위대한 발견은 종종 계획된 경로가 아닌, 용감하게 떠난 '딴짓'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막다른 길 앞에서 좌절하는 대신, 기꺼이 옆길로 새어 춤을 추는 것. 그것이 바로 브라이언 이노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비스듬하고도' 아름다운 전략일 것입니다.
https://linktr.ee/soundfoundrynco
https://www.instagram.com/junse/
https://blog.naver.com/soundfoundrynco/2240000266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