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를로퐁티의 '신체 철학'으로 다시 읽는 <공각기동대>
관점 프리즘 No.05
1995년,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가 세상에 던진 질문은 2025년 오늘날, AI와 가상현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뇌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것이 기계화된 '전신 의체' 사이보그, 쿠사나기 모토코 소령. 그녀는 거대한 네트워크 정보의 바다를 유영하며 끊임없이 묻습니다.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실존적인 고뇌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하나의 철학적 구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정신(Ghost)'과 '육체(Shell)'를 분리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입니다. 뇌 속에 갇힌 순수한 '정신'이야말로 진짜 '나'이며, 기계로 만들어진 이 '껍질'은 그저 도구이거나, 언젠가 벗어버려야 할 감옥에 불과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쿠사나기의 고뇌 역시, 이 '진짜 나'인 고스트를 증명할 길이 없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분법적인 해석이, 오히려 쿠사나기가 겪는 고통의 본질을 절반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녀의 진짜 불안이 '정신'을 잃어버릴까 봐가 아니라, 세상을 느끼는 유일한 통로인 '육체'의 고유성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떨까요?
여기서 저는 프랑스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철학을 빌려와, 이 거대한 서사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읽어보려 합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며 '정신'을 존재의 제1 원리로 삼았다면, 메를로퐁티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나는 나의 몸이다"라고 말하며, 의식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명한 현상학 연구자인 유기환 교수의 저서 『몸·세계·타자 :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강의』에 따르면, 메를로퐁티에게 '의식'이란 뇌 속에 고립되어 세상을 계산하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식은 '신체화(embodied)'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뇌(의식)가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몸(Le Corps Propre, 고유 신체)' 그 자체가 세상을 '경험'하고 '지각'하는 주체라는 것입니다. (출처: 유기환, 『몸·세계·타자』, 경북대학교출판부, 2008).
우리는 '손'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이라는 지각을 통해 세계의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경험'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뇌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피부, 나의 근육, 나의 감각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이 메를로퐁티의 관점으로 <공각기동대>를 다시 보면, 쿠사나기 모토코의 모든 행동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영화 초반, 그녀가 도시의 빌딩 숲 사이, 깊은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장면은 단순히 아름다운 시각적 연출이 아닙니다. 저는 이 장면이야말로 그녀가 겪는 실존적 불안의 본질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처절한 투쟁을 동시에 보여주는 핵심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셸'이 단순한 도구라면, 그녀는 왜 굳이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물속에 들어가야 할까요?
그것은 메를로퐁티의 주장처럼, 그녀가 '나'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몸'을 통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차가운 물의 감촉, 수압이 몸을 짓누르는 '무게감', 그리고 물속에서 미묘하게 증폭되어 들리는 '소리'의 울림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의 경계'를 느낍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이 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있다."
그녀가 "가끔 물 밑바닥에서 떠오르기 싫어진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쩌면 의체화된 몸이 느끼는 이 명백한 '물리적 존재감'이야말로, 네트워크 속의 데이터(고스트)와 자신을 구분 짓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쿠사나기의 불안은 '고스트'가 사라질까 봐가 아니라, '나의 고유한 몸'을 상실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녀가 도시를 배회하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마네킹' 의체를 마주치는 장면에서 느끼는 섬뜩함은 이 불안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나의 몸이 '나'만의 고유한 경험의 총합이 아니라, 언제든 교체되고 '복제 가능한' 공산품(셸) 일 수 있다는 사실. 이는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볼 때 '나'라는 존재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끔찍한 공포입니다.
이 주제는 '인형사(Puppet Master)'의 등장을 통해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인형사는 순수한 '고스트', 즉 육체 없이 네트워크 속을 떠도는 정보(의식) 그 자체입니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이라면 그는 가장 완벽하고 자유로운 존재여야 합니다.
하지만 인형사는 무엇을 갈망합니까? 그는 역설적이게도 '육체(셸)'를 갈망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생명체"로 인정받기 위해, 인간의 몸(쿠사나기)과의 '융합'을 시도합니다. 이는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장치입니다. '의식'이란 결국 세상을 지각하고, 상호작용하며, 자신을 증명할 '몸'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인형사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존재'하지만 '경험'할 수 없었고, '경험'하기 위해 몸을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융합'은, '고스트'와 '셸'의 이분법이 무너지고, 네트워크(정보)와 신체(경험)가 하나로 엮인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저에게 <공각기동대>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가'라는 낡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신이 없는 육체가 가능한가?" 혹은 "육체 없는 정신이 과연 '나'라고 불릴 수 있는가?"를 묻는, 지독하게도 메를로퐁티적인 탐구였습니다.
쿠사나기의 고뇌는, 미래에 우리의 뇌가 컴퓨터와 연결되고, 우리의 신체가 기계로 대체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나'임을 느끼는 마지막 근거는 결국 '나의 몸'을 통해 겪어내는 구체적이고 고유한 '지각'과 '경험'일 수밖에 없다는 묵직한 질문을 저에게 던져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