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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蝕)의 풍경: 베르세르크에서 니체와 달리를 만나다

미우라 켄타로의 세계관에 담긴 운명애와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에 대한 사유

by JUNSE

관점 프리즘 No.04


일식(蝕)의 풍경: 베르세르크에서 니체와 달리를 만나다

미우라 켄타로의 세계관에 담긴 운명애와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에 대한 사유

출처 : Instagram @sandra.s.rush 'Fantasia'

켄타로 미우라(三浦 建太郎)의 걸작 <베르세르크(ベルセルク)>는 단순히 검과 마법이 등장하는 다크 판타지라는 장르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깊은 심연을 품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단순한 서사적 재미를 넘어,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과 투쟁에 대한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두 개의 다른 거대한 봉우리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하나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라는 철학자의 고독한 사유이며, 다른 하나는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라는 화가가 캔버스에 펼쳐놓은 기괴한 꿈의 풍경입니다. 분명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글은 <베르세르크>라는 거대한 텍스트에, 니체의 철학과 달리의 미학이라는 저만의 프리즘을 겹쳐 보았을 때 어떤 무늬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파편들의 모음이자, 개인적인 탐구입니다. 이 글은 정답이 있는 해석이라기보단 제 눈에 비친 세 가지 세계관의 '공명'에 대한 기록입니다.



첫 번째 공명: 가츠(Guts)와 그리피스, '힘에의 의지'가 갈라놓은 두 운명

© Kentaro Miura, Studio Gaga, Hakusensha


<베르세르크>의 서사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은 두 주인공, 가츠와 그리피스의 상반된 욕망과 투쟁입니다. 저는 이 두 인물의 삶의 궤적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는 단순히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창조하려는 생명 본연의 의지입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나 [유고(Nachlass)] 등에서 이 개념의 복잡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피스의 의지: '꿈'이라는 이름의 초월


그리피스는 자신의 '꿈'(자신만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는 이 '힘에의 의지'를 가장 순수하고도 무자비한 형태로 따릅니다. 그리고 '일식(蝕)'이라는 절망의 정점에서, 그는 자신의 인간성, 그리고 가장 소중했던 동료들(매의 단)마저 제물로 바침으로써, '페무토'라는 초월적인 존재(고드 핸드)로 거듭납니다. 그는 자신의 '작은 나'(인간 그리피스)를 완전히 파괴하고, '꿈'이라는 거대한 관념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출처 갤럭시코퍼레이션 SNS 'GD 월드투어 포스터'


하지만 여기서 저는 질문하게 됩니다. 이것이 과연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일까요? '초인'이 기존의 모든 가치(신, 도덕)를 파괴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라면, 그리피스는 오히려 '인과율'이라는 거대한 운명(혹은 신)의 흐름에 순응하고 그 일부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은 아닐까요? 그의 초월은 '자유'라기보다, '꿈'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관념에 스스로를 옭아맨 '예속'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츠의 의지: '투쟁'이라는 이름의 운명애(Amor Fati)


가츠의 '힘에의 의지'는 그리피스와 정반대의 지점에서 폭발합니다. 일식을 통해 모든 것을 잃고, 인간의 존엄성이란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절망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순간.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복수'라는 이름으로, 아니 어쩌면 그저 '살아남겠다'는 본능 하나로 다시 검을 쥡니다.


출처 : TV 조선 '화요일 밤이 좋아' 캡처


그의 여정은 니체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인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의 가장 처절한 구현처럼 보입니다. 니체는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좋은 운명만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닥친 가장 끔찍한 고통과 절망까지도, 그것이 '나의 삶'의 일부임을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껴안으며, 오히려 그 고통을 디딤돌 삼아 자신을 더욱 강하게 단련시키는 태도입니다.


가츠는 운명(인과율)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일 밤 자신을 찾아오는 사도들과 싸우며, 그 거대한 운명의 흐름에 '투쟁' 그 자체로 맞섭니다. 그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하죠. 저는 그리피스의 화려한 '초월'보다, 모든 것을 잃고도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거대한 운명에 흠집을 내려는 가츠의 이 '투쟁'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초인'의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한 모습에 더 가깝다고 느낍니다.



두 번째 공명: '일식(蝕)'의 풍경과 달리의 초현실주의

© Kentaro Miura, Studio Gaga, Hakusensha


<베르세르크>가 저에게 안겨준 또 다른 충격은, 철학적인 서사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압도적인 시각적 이미지였습니다. 특히 '일식' 장면이나 '고드 핸드'가 강림하는 순간, 사도들의 기괴한 변신 장면들은 단순한 '잔인함'이나 '기괴함'을 넘어섭니다.


이 장면들에서 저는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화풍을 보았습니다.


달리는 이성적인 통제가 사라진 '꿈'과 '무의식', '광기'의 세계를 캔버스 위에 가장 사실적인 화법으로 그려낸 초현실주의의 거장입니다. 그의 작품 <기억의 지속>(1931) 속 '녹아내리는 시계'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1946) 속 기이하게 늘어난 다리를 가진 코끼리들은, 우리가 아는 현실의 물리 법칙과 논리가 완전히 붕괴된 세계를 보여줍니다. (달리의 '편집광적 비판(Paranoiac-critical method)'은 MoMA 등에서 그 개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우라 켄타로가 그린 '일식'의 풍경은, 이 달리의 캔버스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논리의 붕괴: 하늘은 피로 물들고, 공간은 무한한 얼굴들의 나선형 기둥으로 변하며, 현실의 경계가 녹아내립니다.


육체의 왜곡: '고드 핸드'의 모습, 사도들의 변신 과정은 인간의 해부학적 구조를 완전히 무시한 채, 공포와 욕망이 뒤섞인 형태로 재조합됩니다.


꿈의 리얼리즘: 가장 무서운 점은, 이 모든 비논리적이고 불가능한 풍경이 미우라 켄타로의 극사실적인 펜 터치를 통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장면처럼 압도적인 리얼리티를 가지고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달리의 그림이 우리의 '무의식'을 시각화한 것이라면, '일식'은 등장인물들의 '절망과 광기'가 현실 세계를 침식하고 구현된, 가장 끔찍한 초현실주의적 공간입니다. 독자는 이 공간을 통해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내가 알던 세계의 근본적인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실존적인 공포를 경험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드리자면, 제가 베를린의 달리박물관에 방문하며 찍었던 사진들을 개인 SNS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를 본 달리 박물관 관계자 분께서 댓글로 흥미로운 관점이라는 의견을 주셨던 적이 있습니다. 아래는 제가 찍었던 사진들의 일부입니다:)


출처 : 개인소장, 베를린 달리 뮤지엄


출처 : 개인소장, 베를린 달리 뮤지엄
출처 : 개인SNS 캡처.


겹쳐지는 풍경: 초현실적 절망 속에서의 실존적 투쟁


이 두 가지 관점, 즉 '니체의 철학'과 ‘달리의 미학'은 <베르세르크> 안에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만나 하나의 완벽한 공명을 이룹니다.


가츠의 투쟁이 그토록 숭고하고 처절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맞서 싸우는 '운명'의 모습이 바로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듯한 '초현실적인 부조리'의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그저 강력한 왕이나 괴물과 싸우는 것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평범한 영웅 서사시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츠는 '일식'이라는, 상식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광기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비이성적이고 부조리한 우주(인과율)'에 맞서 싸우는 실존적인 존재입니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는 합리적인 세계를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이 죽은(가치가 붕괴된)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그 부조리함조차 끌어안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려는 의지입니다.


저에게 <베르세르크>는, 달리가 빚어낸 듯한 기괴하고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니체가 말한 '초인'이 되기 위해 홀로 투쟁하는 '가츠'라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서사시로 읽힙니다. 이 작품이 저에게 남긴 질문은 단순히 "가츠가 과연 복수에 성공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논리와 이성이 통하지 않는, 이토록 부조리하고 잔혹한 운명 앞에서,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계속 싸워나갈 수 있는가?"라는, 우리 자신의 삶을 향한 묵직한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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