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R이 된 장난감: '몰입'과 '휴식'을 위한 청각적 브랜딩
Sound Essay No.57
눈을 감고 상상해 보십시오. 수천 개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이 가득 담긴 상자에 손을 넣고 휘젓는 소리. "촤르륵, 촤르륵." 그리고 원하는 조각을 찾아 다른 조각과 결합할 때 나는 명쾌한 "탁(Click)!" 소리.
레고는 시각적인 장난감이지만, 동시에 매우 강력한 청각적 기억을 가진 브랜드입니다. 이 특유의 플라스틱 마찰음은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놀이', '창의성', 그리고 어린 시절의 '향수'를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2021년, 레고 그룹은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감행했습니다. 스포티파이와 애플뮤직 등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 공식 앨범을 발매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앨범에는 노래가 없습니다. 오직 레고 브릭들이 부딪히고 끼워지는 소리만 3시간 넘게 이어집니다. 이름하여 <LEGO White Noise> 앨범입니다. 도대체 시각 중심의 브랜드인 레고는 왜 '백색소음' 앨범을 냈을까요?
이 앨범의 타겟은 어린이가 아닙니다. 바로 지친 '성인(Adults)'들입니다. 레고는 최근 몇 년간 '성인 팬(AFOL)'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며, 레고 조립을 단순한 놀이가 아닌 '스트레스 해소'와 '명상(Mindfulness)'의 도구로 포지셔닝하고 있습니다.
<LEGO White Noise> 앨범은 이 전략의 정점입니다.
'It All Clicks': 두 개의 브릭이 딱 맞물리는 소리만 반복해서 들려줍니다.
'The Waterfall': 수천 개의 브릭을 쏟아붓는 소리가 폭포수처럼 이어집니다.
이 소리들은 복잡한 멜로디나 가사 없이, 일정한 패턴과 주파수를 가진 'ASMR(자율 감각 쾌감 반응)' 사운드입니다. 성인들은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소리를 들으며 복잡한 업무 스트레스를 잊고, 뇌를 이완시키며, 깊은 잠에 들거나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레고는 소리를 통해 브랜드의 가치를 '장난감'에서 '정신적 휴식처'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브랜딩 관점에서 이 프로젝트가 훌륭한 이유는, 인위적인 로고송(Jingle)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제품이 가진 고유의 '물성(Materiality)'을 그대로 콘텐츠화했다는 점입니다.
레고 브릭이 부딪히는 소리는 그 어떤 악기로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음색(Timbre)'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벼우면서도 단단하고, 날카로우면서도 경쾌한 그 소리는 '레고'라는 브랜드의 정체성(안전함, 정교함, 즐거움)을 청각적으로 완벽하게 대변합니다.
많은 기업들이 브랜딩을 위해 유명 작곡가에게 의뢰하여 멋진 BGM을 만듭니다. 하지만 레고는 자신들의 가장 본질적인 자산인 '브릭'의 소리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우리 제품의 소리 자체가 곧 우리의 음악이다"라는 자신감. 이것은 소비자로 하여금 브랜드를 훨씬 더 진정성 있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이제 사람들은 레고를 조립할 때뿐만 아니라,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할 때도 레고의 소리를 듣습니다. 시각적으로 레고가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청각적으로는 레고의 세계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레고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인사이트를 줍니다. 브랜드 경험은 시각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당신의 브랜드가 가진 고유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제품을 뜯을 때 나는 소리, 매장의 문을 열 때 나는 소리, 혹은 서비스를 이용할 때 나는 알림음. 그 사소한 소리들이 모여 브랜드의 '목소리'가 되고, 고객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는 '기억'이 됩니다.
가장 훌륭한 디자인은 눈에 보이지 않을 때조차 고객의 감각을 붙잡아두는 힘을 가집니다. 레고의 백색소음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