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버닝>과 관객이 서로를 오해하게 된 사연

이창동, 2018


 “출발은... 제가 이 작품을 하기 전에... 시라는 작품 이후에 계속 고민을 하면서, 고민했던 여러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일관된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나? 그 생각을 화두로 삼았었습니다. 그러니까 꼭 한국현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다 화를 내는 것 같아요. 특히 이젠 SNS가 중요한 소통수단이 되었는데, 그 SNS가 익명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화가 나 있어요. 각각의 이유로, 각각의 대상... 대상도 없어요. 그냥 화가 나 있는 거예요.”

 /이창동 ‘버닝’에 대해 김용옥과 대화하던 중


 “중간에 종수랑 한 여자가 말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여자를 위한 나라가 없다. 화장하면 뭐라 하고’라 한다. (이창동) 감독님이 이 장면을 괜히 넣은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었을 것이다.” “여자들이 지지를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 강도가 더 있었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자들이 지지를 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려면 정치적으로, 영화에서도 그런 게 나와야 만들어진다.”

 /전종서 ‘버닝’에 대해 톱스타뉴스와 인터뷰하던 중


 1.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행사도우미의 그 뜬금없던 대사는 이창동의 표현대로라면 ‘화’의 돌출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종수가 해미를 찾아 헤매며 그녀의 실종이 벤이란 부자녀석과 관련있을 거라는 불확실한 의심과 분노를 쌓기 시작할 무렵, 그는 우연히 자신이 힘든 건 여자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역시 분노의 불확실한 대상을 확정한) 화가 난 여자와 마주쳤던 거겠죠. 


2. 하지만 같은 영화 속 대사에 대해 전종서는 다르게 받아들였던 듯합니다. 별 것 아닌 디테일에 대한 시각차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 영화의 큰 방향성에 대한 시각차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전종서처럼 이해하는 경우를 실제 보기도 했고 영화의 다른 부분부분에 대해서도 너무나 상이하게 이해하는 경우들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습니다. 아무리 관점과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한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누적되어 영화의 큰 방향성(이 영화가 대체 우리와 어떤 문제의식을 공유하려 했는지)조차 불확실해지면 영화의 존재의의 자체가 ‘보이지 않는’ 보일이란 고양이마냥 투명해지지 않을까요?


 3. 개봉한 지 일 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버닝>은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테마를 관객들과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소통의 측면에서, 스스로 기대했던 수준만큼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되짚어 보는 게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이고, 이 영화가 계속 투명해져 사라지지 않도록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를 찾는 게 두 번째 목적입니다. 그리고 <버닝>을 통해 오늘날 영화와 관객의 소통에 대해서도 보편적인 얘기를 할 수 있다면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4. 우선 이 영화는 왜 이렇게 모호하게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요? 배경부터 감독의 목소리를 통해 헤아려 보겠습니다. 당시 다양한 인터뷰가 있었지만 위에서 인용한 영상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속내를 드러낸 것 같아, 역시 거기서 감독의 얘기를 옮기겠습니다. 좀 길더라도...      


 “요즘 영화들의 추세를 보면,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시키는 영화들이... 선두에 선 영화들의 추세인 것 같아요. 우주공간이 됐든, 뭐 아니면 전쟁터가 됐든, 실제로 그 현장에서 체험하는 것 같은, 체험감을 계속 관객들한테 전해주는, 그게 요즘 영화의 트렌드 같기도 하고... 그게 영화적체험이란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기도 한데... 전 그게 한편으로는 게임의 영향을 받은 것 같고요. 요즘 게임이라는 게 점점 체험하는 식으로,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서... 그렇게 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영화라는 것이 그렇게 체험시키는 거라면 ‘거리두기’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아시다시피 거리두기라는 게 좀 객관적인 거리를 두면서 현실을 성찰하고 객관화시키면서... 몰입하고 감정이입하는 것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밖으로 빠져나와서... 그 대상을 바라보며 자기도 객관화시키면서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그게 연극에서부터 시작해서 영화의 중요한 매체특징이라 볼 수 있는데 이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질문을 하게 됐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 영화를 통해 영화매체가 가진 순수한 감각을 이미지를 통해서든, 소리를 통해서든, 음악을 통해서든... 체험하면서 느끼게 하는 게 1차적이고 또 동시에 그 자체를 해석하고 그 자체의 의미를 찾는 걸 동시에 진행하는... 그러니까 약간 서로 모순되는 거기도 한데, 그 둘을 겹치게 하면서 결국 현실과 영화매체, 또 영화 속 이야기를 체험하는 동시에 스스로 의미를 찾고 해석하게 하는 것, 그걸 어떻게 영화로 가능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했기 때문에... 일반관객들은 물론이고 영화전문가라 하는 사람들조차 소화시키기가 쉽진 않을 거다, 생각을... 했었습니다.”


 5. 이창동이 최근 주류영화들의 추세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는 마블영화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고, 또 당시 버닝이 개봉했을 때 마블시리즈와 경쟁하는 구도였다고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마블로 대표되는 영화적 체험만이 중시되는 흐름에 영화의 거리두기라는 걸 되살려 <버닝>에 그 두 가지를 함께 담아내고 싶었다는 의도로 읽혀집니다. 여기서 짚고 싶은 건 ‘영화적 체험’을 중시하는 주류영화들을, 관객들은 ‘영화적 체험’만으로 감상해왔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6. 마블 뿐 아니라 놀란 같은 감독의 영화들, 그리고 대다수의 장르영화들은 규모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영화적 체험’을 중시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극단에 있는 마블시리즈라 해도 관객은 영화적 체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찾고, 의미를 읽는 나름의 해석행위를 함께합니다. 그 해석이 이창동의 말한 해석과 동의어인지, 이창동이 말한 ‘거리두기’와 같은지는 일단  미뤄두고. 중요한 건 마블이나 다른 블록버스터도 상당히 추상적인 해석이나 의미도출이 가능하게끔 이미 영화들 자체에 전략적으로, 노골적으로 단서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신화적인 영화일수록 더 우화적으로 영화 밖 텍스트를 끌어와 의미를 증식시키는 게 가능합니다. 비평가들도 일조합니다. 예를 들어 현시대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여성주의’로 의미 부여되게끔 영화 속에 단서들이 준비되었다면 그걸 고스란히 받아 영화 밖 텍스트로 연결해주고 그런 예정된 해석이 영화 자체의 미흡함까지도 합리화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즉 오늘날 관객들은 영화의 극단적으로 감각적인 체험에 익숙할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추상적인 해석에도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왜 극단적인 해석이고 심지어 과잉해석일 수조차 있는지는 신형철의 글을 빌려 설명할까 해요. 자꾸 인용해서 그런데... 솔직히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권위를 이용해서라도 어떤 합의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네요.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 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이런 정리를 시도해본 것은 이 세 작업의 몫을 혼동하거나 작업의 단계를 무시하는 사례들이 더러 있어서다. 예컨대 밝혀지지 않은 사실 관계 앞에서 고된 실증 작업을 생략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공백을 메우거나(주석을 해석으로 대체하는 경우), 지난한 해석의 노동을 건너뛰고 신속히 텍스트를 분류한 다음 그것으로 해석이 완료됐다고 믿거나(해석을 배치로 대체하는 경우) 하는 일들 말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두고 ‘금융대란 이후 중산층의 불안’을 다룬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 텍스트를 더는 ‘해석’할 필요가 없도록 신속히 ‘배치’해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을 충분히 한 사례는 아직 많지 않은 것 같다.”

신형철의 씨네21 ‘테이크 쉘터’ 칼럼 중


 7. 신형철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오늘날 흔하게 영화를 얘기하는 방식이란 그 영화A는 영화 밖 B를 다룬 것이라고 신속히 배치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B를 다루는 영화니까 영화 속 디테일도 이런저런 의도, 의미일 거라며 거꾸로 해석하기도 하죠. 텍스트의 작은 단서를 작가의 전언처럼 받아들여서 그것으로 텍스트 전체를 재구성하거나 규정짓고 정의하기도 하죠. 물론 모든 감상이나 해석은 자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때로는 적극적인 해석이 요구될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게 옳고 그른지는 일단 제쳐두고 오늘날 관객들은 전문가 못지않게 추상적인 해석에도 익숙해졌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한편으로 그런 추상적 해석이 효율적이기도 하죠. 쏟아지는 컨텐츠를 빨리 소비하고 그만큼 그 컨텐츠가 내게 무슨 의미였는지를 빨리 정의 내려야만 하니까. 아, 이건 이런 영화였지, 그래 그건 그런 영화였어, 라고 영화에 대한 해석이나 비평 또한 빠르게 연소시키는(버닝하는) 풍토가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8. 그렇다면 관객들이 ‘영화적 체험’에만 몰두하지 않기를, ‘거리두기’도 함께하기를 유도했던 이창동의 시도 즉 텍스트 곳곳 메타포나 상징들은 예상 밖 부작용을 일으켰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이미 <버닝>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창동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기 때문에 다른 영화들보다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 접근해야겠다, 무의식적인 부담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전작들만 해도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화들인데도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감상이 이뤄지는 경우를 봐왔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영화로부터 거리를 두고 바라볼 준비가 된 관객들에게 <버닝>의 다양한 미끼들은 더욱 거리를 두고, 영화가 실제 의도한 것보다 더욱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해석해내야 할 것 같다는 신호, 강박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9. 저의 가설은 <버닝>이 다수관객들과의 소통에 실패했다면, 그 관객들이 꼭 ‘영화적 체험’에만 몰두했기 때문은 아닐 거라는 겁니다. 관객은 여태 해오던 방식대로, 그보다 훨씬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거리두기’가 이창동의 의도보다 훨씬 더 ‘아득한 거리두기’가 돼버렸을지도... 이창동은 종수나 해미로부터 몇 걸음 물러나와 인물을 지켜보듯이 객관화하며 함께 성찰하기를 원했던 건데, 관객들은 영화로부터 스크린과의 거리 이상으로 멀어져 해미나 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무슨 메시지일까 동요하며 종수보다 더 길을 헤매었을지도...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종수가 말했던 것보다도 더한 수수께끼 같은 세계로 남겨졌을지 모릅니다. 그 정도로 극단적인 혼돈을 원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은 영화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영화 속에 남겨진 종수보다는 명료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10. 결국 <버닝>은 ‘거리두기’에서 좀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영화적 체험’은 어느 정도 전달되었지만 그것과는 너무나 극단적인 ‘거리두기’로 많은 이들이 양극단을 오가며 혼란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 거리두기는 이창동이 원한 거리도 관객이 원한 거리도 아니었던 것 같죠. 그러므로 저는 이창동과 관객이 만날 수 있는 적절한 거리를 찾아서 내 나름대로 <버닝>의 텍스트를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버닝>의 메타포들은 <버닝>을 통째로 해석하거나 <버닝> 밖 텍스트에 배치되기 이전에 1차적으로 종수가 만나는 ‘해미라는 세계’와 ‘벤이라는 세계’를 해석하는 단서들입니다. 그들을 해석하고 휩쓸리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종수라는 세계’가 재배치됩니다. <버닝>은 이 세 사람의 이질적인 세계가 충돌하고 흔들리는 아름다움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잘 표현해보고 싶은데 다음에 해야겠네요. 이 글의 두 번째 목적은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창동 인용 https://www.youtube.com/watch?v=1bC4144Ej10&t=542s

전종서 인용 http://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16266

신형철 인용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3370




작가의 이전글 성탄전야의 꿈여행 <아이즈 와이드 셧>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