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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성탄전야의 꿈여행
<아이즈 와이드 셧>

스탠리 큐브릭, 1999

 지금 이 영화의 제목을 유튜브에 검색해보면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같은 음모론이 수두룩합니다. 이 영화를 단순 요약한 흔한 영상에 달린 맨 윗자리 댓글조차 스탠리 큐브릭이 일루미나티를 폭로하려는 이 영화를 찍어서 그들에게 암살당했다는군요.

 도대체 뭔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사람들이 참... 현실 안에서도 꿈꾸고 싶어 하는구나. 현실이 현실보다는 비현실적이기를 다들 조금씩은 바라는구나. 산타클로스가 없는 현실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것 일지도요. 


 꿈을 꾼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일 같아요. 

 현재의 프레임 안에서 만족하거나 머무르지 못하고 다음 숏을 원하고 그 다음 씬을, 그리고 새로운 시퀀스가 다가오기를 바라는 거죠. 그렇게 사진으로 남기를 원치 않는 꿈은 사람들의 삶을 활동사진으로 이끕니다. 저에게는 꿈꾸다, 라는 표현이 욕망하다, 라는 표현과 아주 가까운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그렇게 보자면 욕망(꿈)이 사람들의 삶을 이끄는 거죠. 가끔은 거의 폭력적일 만큼 욕망은 우리의 삶을 다음 숏과 다음 씬과 새로운 시퀀스로 질질질질 끌고 다닙니다. 설령 나에게 사진처럼 지금 순간에 영원하고픈 바람이 있더라도 가능하지 않죠. 가능하지 않아도 노력하고 버텨보고는 싶은데 그러려면 나는 내 욕망(꿈)과 끊임없이 싸워야만 합니다.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고 현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감옥에 갇힌 기분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나의 꿈(욕망)을 따르기만 한다면 나는 해방감과 자유를 느낍니다. 그럼 이것이 진정한 자유일까요?


 1. 타이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흐르며 검은 화면에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스탠리 큐브릭 세 이름이 차례로 떠오릅니다. 이어서 황금빛 조명이 은은한 방, 거울 앞에서 검은 드레스를 사르르 미끄러뜨리는 니콜 키드먼의 황금빛 나신이 풀샷으로 잡히는데요. 야해서 스틸컷을 올릴 수 없네요. 그녀의 아찔한 뒷모습에 말 그대로 카메라가 질끈 눈감아버리죠. 다시 검은 화면, EYES WIDE SHUT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만약 20여 년 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어느 남자가 아내와 자녀를 둔 남편이자 아버지였다면, 순간적으로 마음만은 질끈 눈감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언뜻 스쳐간 그 장면에 함께 스쳐간 내 욕망이 왠지 두려웠을 테니까요. 언뜻 야해 보이기만 하는 이 영화는 실은 자신의 감당 못할 욕망에 직면한 자의 두려움을 보여줍니다. 


 2. 톰과 니콜

 영화에 출연할 당시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은 아직 부부였고 그냥 부부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부부였겠죠. 대중이 성적대상화 하고 싶은 유부남과 유부녀. 대중이 그들에게 느끼는 관음증적 욕망을 큐브릭은 영화의 프레임 안까지 끌고 옵니다. 관객은 프레임 안의 톰과 니콜에게 성적매력을 느끼고 그들의 일상을 훔쳐보고 싶어 하는데(초반에는 톰과 니콜로 바라보게 되죠) 반면 프레임 속의 톰과 니콜은 외출채비를 하며 서로를 잘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톰의 뒤에서 니콜은 거리낌 없이 소변을 보고 자기모습이 어떤지 묻는 니콜에게 톰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훌륭하다고 말해버리죠. 이렇게 관객이 그들을 보는 시선과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또는 영화안팎 욕망의 온도차가 이루는 대조가 영화 속에서도 꿈속처럼 재현됩니다. 좀 함부로 말해버리자면 관객은 지금 내 옆에 앉은 연인이나 배우자가 아닌, 영화 속 그들을 꿈꾸는데(욕망하는데) 영화 속 그들은 서로가 아닌 또 누군가를 꿈꾸죠.(욕망하죠) 꿈꾸며 욕망하는 동시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관객이 바라보는 꿈(영화)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시무시한 욕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극단화되는 더욱 깊숙한 꿈으로 빠져듭니다. 이토록 완벽한 크리스마스 영화가 또 어디 있을까요?


 3. 빌과 앨리스

 이제 톰과 니콜은 영화 속 빌 하포드와 앨리스 하포드입니다. 

 빌은 뉴욕의 전도유망한 의사, 앨리스는 갤러리를 운영하다 망해서 가사일을 하고 있다네요. 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그들 부부는 귀여운 딸이 있고 멋진 아파트가 있고 그들보다 훨씬 고위 상류층인 빅터 지글러(시드니 폴락)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도 받습니다. 우아한 스테디캠 샷을 받으며 빌과 앨리스가 나란히 입장하는 무도회장은 은은한 황금빛 전구가 커튼처럼 사방의 벽을 장식하고 색색의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구석구석 놓여있습니다. 클림트의 화려한 회화를 연상시키는 미장센은 이후의 맨해튼 거리와 상점들, 여러 실내외 장면에서 부분적으로 반복되며 일관적인 컨셉을 유지할 것입니다. 단순히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라기보다 현실의 풍경이 꿈에서 반복되는듯한 인상을 주면서요. 그렇다면 왜 현실은 꿈에서 반복돼야 할까요? 그것은 아마 꿈 이전에 현실의 그 장소에서 달성되지 못한 잉여된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일 겁니다. 

 무도회장에서 빌과 앨리스는 헤어집니다. 앨리스는 헝가리 신사와 함께 춤을 추면서 그의 노골적인 유혹을 받게 되죠. 빌은 늘씬한 두 명의 모델에게 양팔이 꿰어집니다. 앨리스는 샴페인에 취했지만 반지 낀 손을 흔들어 보이며 결국 헝가리 신사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빌은 두 명의 모델이 입을 모아 유혹하는 Where the rainbow ends에 끌려갈 뻔 하지만 지글러의 부름을 받고 결국 그 미지의 곳에 이르지 못합니다. 


 4. 거울 속의 거울

 무도회장 시퀀스 직후의 씬. 벌거벗은 엘리스는 거울 앞에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귀걸이를 떼고 있습니다. 벌거벗은 빌이 다가와 그녀의 몸을 꿈꾸듯이 바라보고 거울 속 그녀와 자신을 확인하며 익숙한 아내의 젖가슴을 새삼스런 손길로 어루만집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들은 서로에게 일상이었는데 황금빛의 무도회장에서 그들을 꿈꾸듯 바라보았던 외부의 시선, 타인들의 욕망에 힘입어 이제 그와 그녀의 육체는 거울 속에서 황금빛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자기 목덜미에 입 맞추는 남편을 끌어안은 앨리스는 거울 속 잠깐이나마 낯설어진 자신들의 모습을 관찰합니다. 더 이상 서로를 꿈꿀 수 없어진 젊은 부부는 오랜만에 꿈같은 밤을 보낼 수 있었겠죠. 자신들을 성적대상화한 타인들 덕분에 다시 서로를 성적대상화하여 그 대상을 꿈꾸고 욕망하면서.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 빌과 앨리스의 건조한 일상이 교차되는 몽타주로 펼쳐지면서 그 잠깐은 잠깐에 불과했음을 보여줍니다. 


 5. 은은한 황금빛신비로운 파란빛

 각자의 일과를 보낸 부부는 밤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단 둘이 조우합니다. 앨리스와 빌은 마리화나에 취해 지난밤 파티에서 각자 겪었던 얘기를 주고받는데...

 앨리스/ 말해봐... 그 여자 둘, 그때 파티에서 당신이랑 있었던... 혹시 걔네들이랑... 했어?  

 빌/ (마리화나 연기에 목 막힌 듯) 뭐? (콜록) 뭔 소리야? 

 앨리스/ (이거 왜 이러시냐는 듯 한숨 뱉으며) 당신이 대놓고 작업 걸었던... 여자애 둘 있잖아. 

 빌/ (어이없어하며) 난 아무한테도 작업 건 적 없어. 

 앨리스/ (미심쩍어하는 엷은 미소) 그럼 걔네들 누구였는데? 

 빌은 그냥 모델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글러가 위층으로 호출해서 그들과는 그 이상 함께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죠. 이번에는 빌의 차례입니다. 앨리스와 춤췄던 그 남자는 누구였냐고 묻고 이어서 그가 뭘 원했는지 질문하죠. 섹스... 위층에서 라고 앨리스가 마리화나에 취한 웃음으로 답합니다. 빌도 웃습니다. 내 와이프랑 퍽, 하고 싶었단 거지... 빌은 미소를 머금으며 아내의 몸을 쓰다듬습니다. 그럴 만 하지, 그가 말합니다. 왜냐면 당신이란 여자는 진짜, 진짜 아름다우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앨리스가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파란빛이 들어찬 옆방 문턱에 서서 빌을 굽어보며 따지고 듭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쁘니까... 나한테 말 거는 남자들은 죄다 나랑 퍽 하고 싶어서 그런다는 거야? 살짝 난감해진 빌은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서도 남자들은 보통 그렇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함정에 빠진 것이죠. 

 그럼 당신도 걔네들 둘이랑 하고 싶었겠네, 앨리스가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합니다. 

 예외란 있지. 빌은 빠져나오려 시도합니다. 왜 당신만 예외인데? 앨리스의 예리한 공격에 빌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보지만 그럴수록 그녀를 점점 더 빡치게 만듭니다. 앨리스는 빌의 입을 통해서 이실직고하게 만들고픈 어떤 답변이 있습니다. 그 답변을 빌은 회피하려 들고 그러자 앨리스는 답답해하고 분개합니다. 빌이 그녀를 진정시켜 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앨리스는 오늘 밤 끝장을 보겠다는 식으로 파란빛이 가득한 창가 쪽으로 동선을 옮겨갑니다. 그녀는 남편의 직업까지 들먹이며 병원에서 여자환자의 맨 가슴을 대했을 때 그럴 때 한 번이라도 당신은 꼴려본 적이 없느냐고 따집니다. 여기에 있어서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빌은 절대 환자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못 박습니다. 그러자 앨리스는 공격의 방향을 선회해 여자환자들은 당신을 보며 한 번이라도 섹스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라고 묻습니다. 이리저리 막고 피해보다 결국 코너에 몰린 빌은 결국 이렇게 대꾸합니다. 여자들은 원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앨리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빌을 삿대질하며) 수백만 년의 진화! 그치? 그렇지? 남자들은 여기저기 쑤실 만한데 다 쑤시고 다니고 근데 여자들은, 여자들은 그냥 집 지키고 헌신하고 뭐 그런 좆같은 것들! 

 빌/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좀 너무 단순화해버린 감이 있지만... (눈을 마주보며) 그래. 그런 거잖아.

 앨리스/ (천천히 힘주어 덧붙이길) 니네 남자들이 아는 게 겨우 그거라면 말이지. 

 빌/ (이제 넌더리가 나다는 기색) 들어봐, 내 생각에 당신 쩔어가지고 나한테 시비 걸다가 이제는 나 질투하게 만들려는 거잖아.  

 앨리스/ 근데 당신은 질투하는 타입이 아니잖아. 그치?  

 빌/ 그래. 난 아니지. 

 앨리스/ 당신은 나 때문에 질투해본 적도 없잖아, 그치?

 빌/ 그래. 없어. 

 앨리스/ (목소리 드높이며) 그럼 왜 당신은 나에 대해선 질투조차 안하는 건데! 

 빌/ 글쎄, 모르겠어. 아마도 당신이 내 아내니까! 당신이 내 아이 엄마니까! 그리고 절대 당신이 날 배신하지 않을 걸 아니까!

 앨리스/ 당신 정말이지... 정말 그렇게 믿는구나. 그치? 

 빌/ 그래. 나 당신 믿어. 

 푸흡, 앨리스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허리까지 꺾으며 자지러집니다. 이때 이 영화의 유일한 핸드헬드 숏으로 휘청대는 앨리스를 잡는데 마치 영화 속 세계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함께 요동치죠. 남편을 손가락질하며 그를 비웃는 듯한 그녀의 폭소는 퍽 과장되어 있어서 왠지 자학적이라는 인상마저 줍니다. 앨리스는 파란빛이 흘러나오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 주저앉아 천천히, 나직한 목소리로 작년여름 그녀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빌에게 들려줍니다. 

 빌과 앨리스가 딸과 함께 생활하는 아파트실내는 은은한 황금빛 조명이 넓은 공간을 채운, 벽마다 예쁜 그림들이 즐비한 고급스럽고 안락한 공간입니다. 하지만 그 불빛이 닿지 않는 깊숙한 방들은 신비로운 파란빛에 잠겨있죠. 개인적으로는 그 색의 대비가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라는 유명한 그림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앨리스가 딸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고흐 초상화가 인쇄된 상자를 포장하는 씬이 나왔던 덕분일지도 모르죠.) 은은하고 따스하지만 인공적인 노상카페의 황금빛, 신비롭지만 음울하기도 한 밤하늘의 파란빛. 영화에서도 비슷하게 대조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환한 실내의 구석구석 숨겨진 파란빛은 빌과 앨리스 부부가 숨기고 감추고 싶었던 각자의 꿈, 판타지, 욕망 같은 뉘앙스죠. 이제 앨리스는 그 파란빛을 배경으로 그녀의 이 남편과 딸과 함께해온 현실을 심각하게 위협했던 사연을 털어놓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뭔가를 꼭 듣고 싶었던 것보다도 더 간절히 뭔가를 털어놓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6. 반복과 변주

 앞서 앨리스가 고백하고 빌이 꼼짝없이 경청하는 장면에서 톰과 니콜은 절제하는 한편 1초1초 섬세한 감정의 역동을 표현하는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숏-리버스 숏이 오가며 클로즈업된 빌의 얼굴이 네다섯 번 정도 잡히는데 그는 말 그대로 꼼짝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죠. 아내를 응시하는 눈빛과 호흡의 미묘한 변화, 조금씩 기울어지며 그늘이 드리워지는 얼굴로서 그동안 그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아니 믿음으로 의심을 덮으려 했던) 황금빛 현실이 아내의 파란빛 꿈의 폭로로 인해 흔들리고 요동치고 붕괴되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전화가 걸려옵니다. 빌은 주치의로 보살피는 환자가 임종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집과 앨리스로부터 벗어나 환자의 맨션으로 향하는 택시 뒷좌석에서도 빌은 현실이 아닌 앨리스가 들려준 이야기, 그녀의 꿈(판타지, 욕망)을 응시합니다. 작년여름 그녀와 딱 한 번 시선을 마주쳤을 뿐인 그 해군장교가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몸을 탐닉하며 그녀는 환희에 차 신음하는 이미지는 빌의 상상에서 파란빛이 입혀진 흑백의 포르노그라피로 그려집니다. 그 해군장교... 그가 자신을 원했다면, 단 하룻밤이었을지라도 당신과 우리 딸, 우리가 가꿔온 삶과 우리의 미래 모든 걸,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는(그러고 싶었다는) 앨리스의 고백이 아직도 빌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맨션에 도착해 환자의 임종을 확인한 빌은 환자의 딸, 메리언과 단 둘이 마주앉아서 대화를 나눕니다. 숏-리버스 숏을 오가는 이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는 침착한 빌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감정의 동요, 심리의 극단을 오가는 메리언의 얼굴은 클로즈업해서 그녀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갈등의 전개를 보여줍니다. 빌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설명하는 메리언의 처음 숏에서(스틸컷은 안 올렸지만) 그녀의 얼굴은 배경의 파란빛 창문과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있습니다. 빌이 사려깊은 위로의 말을 건네자 메리언의 다음 숏에서 프레임은 살짝 이동하여 이제 그녀의 얼굴은 배경의 파란빛으로 절반쯤 빠져들었습니다. 그녀의 얼굴 절반은 조명의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다른 절반은 깊게 그늘져 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찰나 빌의 눈치를 살피고 입술로는 자신의 약혼남 칼에 대해서 말하지만 마음속은 마주앉은 빌을 꿈꾸며 갈망하고 갈등합니다. 머지않아 칼과 결혼해서 그와 함께 미시간으로 떠날 거라는 메리언의 얘기에도 빌이 침착한 태도로 일관하자 메리언은 가능(감당)할 수 없는 꿈에 절망하고 슬픔에 북받쳐 결국 울음을 터뜨립니다. 빌이 관심을 기울이며 몸도 그녀 쪽으로 기울이자 신비롭고 음울한 그녀의 파란빛 꿈, 그 프레임으로 그가 들어와 버리고 더는 억누를 수 없어진 메리언은 빌의 얼굴을 감싸며 그의 입술에 입 맞춰 자신의 꿈을 실현해버립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건 앨리스의 꿈(판타지, 욕망)이 꿈속의 재현처럼 빌의 현실에서 반복되는 상황입니다. 빌이 메리언을 진정시키려 애쓰던 중 초인종이 울리며 그녀의 약혼남 칼이 맨션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끼어듭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하녀의 안내를 받아 빌과 메리언, 그녀 아버지 시신이 있는 방으로 칼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따라가는 팔로우샷은, 앞서 빌이 그 방으로 들어갔을 때의 촬영방식이 그대로 반복된 것입니다. 메리언과 그녀의 약혼남이자 수학교수 칼은 앨리스와 빌과 완벽히 닮지는 않았지만 퍽 유사한 인상이고 그들도 앨리스와 빌처럼 상류층의 인텔리 커플입니다. 이러한 몽환적 구조의 반복에서는 당연히 차이도 나타나겠죠. 꿈이 현실을 반복하는 이유는 반복 속에서 변주를 통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니까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변주는 빌의 위치입니다. 이제 빌은 그의 아내 앨리스가 꿈꿨던 바로 그 해군장교의 위치에 놓여 있고 바로 그 위치에서 또 다른 빌과 앨리스, 즉 칼과 메리언을 바라봅니다. 

 이걸 두고 정확히 어디까지 현실, 어디서부터는 꿈이라고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영화의 어느 부분은 현실이며 어느 부분은 꿈이라고 서로 다른 차원이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은은한 황금빛 프레임에 신비롭고 음울한 파란빛이 스며드는 것처럼, 현실에 꿈이 스며들고 꿈꾸던 욕망이 현실의 프레임으로 흘러나오는 것처럼, 서로 다른 색채는 공존하고 현실과 꿈은 공존하며 욕망과 두려움이, 판타지와 금기가 함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이 꿈속에서 반복되고 변주된다면 꿈 또한 현실에서 충분히 반복되고 변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는 세계를 어떤 우화나 알레고리로 은유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영화 안에서 보여주려 함입니다. 왜냐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란 영화 밖에서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닌, 꿈과 현실의 어느 사이에서 실재하는 것이니까요. 


 7. 현실과 꿈의 어느 사이맨해튼 거리  

 큐브릭이 비행기 타는 걸 무서워해서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촬영했다고는 하는데 그 밖의 중요한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런던에서 재현된 맨해튼의 밤거리는 실제 모습을 모사하려는 세심한 노력이 깃든 다른 한편으로 실제 맨해튼과 차별성을 두려는 세심한 노력 또한 깃들어 있습니다. 거리 세부명칭은 실제와 다르고 큐브릭이 젊은 시절 드나들었던 재즈클럽이 한쪽 구석에 잡고 있습니다. 훨씬 위에서 말했듯이 무도회장의 금빛커튼, 색색의 전구와 같은 미장센의 일부가 빌이 지나치는 가게 유리마다 그리고 그가 입장하는 다양한 실내마다 일관된 컨셉으로 반복됩니다. (그러니까 꿈결처럼) 크리스마스 시즌 풍경이 최종목적이었다 보기엔 다소 인공적이고 거꾸로 크리스마스 시즌이라는 특별한 배경을 이 특별한 맨해튼 거리를 표현하기 위한 적합한 구실로 활용한 쪽에 가깝습니다.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러나 현실과 꿈 어느 쪽으로만 치우친 거짓이 아닌 그 사이의 진실한, 진짜 실재하는 풍경을 보여주려는 최종목적이 아니었을까요? 회화에 빗대자면(잘 모르지만) 앞서 언급한 고흐의 그림처럼, 그를 비롯한 후기인상파 화가들이 구상과 추상의 어느 사이에서 이 세계의 진실한 모습을 담아내려 한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영화의 이전 장면까지는 건물외관을 보여주는 도입샷과 택시가 스쳐 지나는 도로를 보여줬을 뿐입니다. 빌이 메리언의 맨션을 나온 이후부터 영화는 이 특별한 맨해튼 거리를 노출시킵니다. 빌은 어둠속에 노랗게 파랗게 빛나는 상점 간판들을 지나쳐서 옆을 돌아보는데 그의 시점샷으로 벽에 기대 서로를 애무하는 커플이 잡힙니다. 빌은  또 다시 앨리스의 꿈(Blue Movie)을 떠올리고 격분에 사로잡힙니다.(이때 양 손뼉을 격하게 마주치는 톰 크루즈의 액션은 ‘샤이닝’에서 잭 니콜슨이 가족으로부터 고립된 후 오버룩 호텔의 환영과 마주하기 직전의 액션과 똑같습니다.) 모퉁이를 돌아 나온 빌은 웬 양아치 애새끼들과 맞닥뜨리고 그들로부터 faggot이라 성희롱당하며 약간의 폭행까지 당합니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횡단보도 앞에 선 그에게 개인사업자(즉 창녀) 도미노가 접근해오죠. 빌은 도미노의 집으로 갑니다. 복수심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밤 그의 피상적세계가 균열하여 세계의 참모습, 폭력과 욕망이 노출된 덕분인지 잘 알 순 없지만. 아무튼 그는 아내 앨리스의 전화를 받고 그냥 그곳을 빠져나옵니다. 여전히 방황하다가 친구 닉이 공연하는 소나타 카페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어떤 비밀스런 무도회(일루미나티?)에 입장할 수 있는 암호 ‘피델리오’를 획득합니다. 암호 말고도 코스튬이 필요했기에 그는 ‘Rainbow’라는 간판이 내걸린 의상대여점을 찾아갑니다. 지글로의 무도회에서 한 쌍의 모델이 입을 모아 유혹했던 Where the rainbow ends 바로 그 미지의 장소에 다시 다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펼쳐질 비밀무도회는 일루미나티가 아니라, 지글로의 무도회의 다른 버전, 겉과 속이 뒤집혀 드러난 실체, 참모습에 다름 아니고 이 한 쌍의 무도회는 이란성 쌍둥이처럼 앞뒤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가식적이고 위선에 찬 세계를 까뒤집어 폭로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드러난 비밀무도회가 곧 꿈과 판타지의 실현, 욕망의 해방과 자유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욕망에는 그의 또 다른 쌍둥이 ‘두려움’이 동행합니다.


 8. Fear And Desire

 스크롤하기 귀찮으시겠지만 앞서 메리언이 빌에게 입 맞추기 직전의 스틸컷을 다시 보신다면, 그녀의 울먹이는 표정이 어떤 두려움마저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하시게 될 겁니다. 빌을 꿈꾸고 욕망할 뿐 아니라, 그게 가능하지 않음에 절망하고 슬퍼할 뿐만 아니라,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꿈이 욕망이, 자신의 현실과 삶을 파괴하고 그것으로 인해 앙갚음 당할까봐. 메리언의 그 표정은 이 영화의 많은 이미지에 잔상처럼 되살아납니다. 드디어 빌이 도착한 Where the rainbow ends 비밀무도회역시 마찬가지죠. 노골적인 새빨간 카펫 위에 같은 색의 망토와 가면을 쓴 우두머리, 그를 둥글게 둘러싸고 무릎 꿇은 역시 망토와 가면을 쓴 여자들. 이곳은 흡사 성교를 우상 숭배하는 이단적인 파시스트들의 모임 같습니다.(그래서 결국 일루미나티라는 걸까요?) 아무튼 그들과 같이 망토 쓰고 가면 쓴 빌의 시점에 비춰진 트래블링 샷으로 다채로운 성행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전혀 야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다소 신비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여기서 가장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것은 그들의 헐벗은 나체가 아니라 그들의 가면 속 숨겨진 얼굴, 가식과 위선으로 포장했던 일상의 또 다른 가면들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가면을 벗고 다른 하나의 가면으로 갈아 쓴 셈이죠. 가면 쓴 여자 한 명이 다가와서 빌에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빌이 지글러의 무도회에서 위층으로 불려갔던 장면과 유사하게 가면 쓴 여자도 위층으로 불려갑니다. 빌이 그곳의 모두에게 포위당해 가면이 벗겨지고 위험에 처했을 때 바로 그 가면 쓴 여자가 나타나서 빌을 구해줍니다. 지글러의 무도회에서 빌이 한 여자의 목숨을 구해줬던 것과는 입장이 바뀌었죠. 그래서 그녀가 그녀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 

 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온 빌은 꿈꾸고 있는 아내 앨리스를 발견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앨리스는 그 꿈 이야기를 빌에게 들려줍니다. 그녀의 꿈은 해군장교가 등장한 것을 제외하면 조금 전까지 빌이 비밀무도회에서 겪었던 사건과 어렴풋하게 닮아있습니다. 어쩌면 그녀도 그곳에 빌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모습으로 함께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꿈속에서는 그토록 즐거워했으면서 꿈에서 깬 뒤에는 눈물 흘리며 무서웠다고 고백하는 걸까요? 무서웠기 때문이겠죠. 진심으로.

 비밀무도회가 군중들로부터 자신의 민낯이 폭로되는 두려움이었다면 그 전과 이후로 빌이 마주치는 다양한 낯선 인물들은 저마다 가면 속의 또 다른 가면을 내비치면서 또 다른 두려움으로 그를 위협합니다. 불륜과 미성년자와의 섹스, 근친상간, 에이즈, 심지어는 동성애까지도. 물론 불륜은 로맨스였을 수 있고 미성년자는 성년이었을지도 모르고 근친상간은 우려에 불과했으며 에이즈는 예전만큼 공포는 아닌데다 동성애는, 그게 왜 두려움의 대상인가요? 뿐만 아니라 그 밖의 것들까지 그것들 자체로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에이즈는 좀 걸리네요) 그것들이 빌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자신의 삶을 위협하기 때문에 무서울 수 있습니다. 결국 객관적인 두려움이란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그 모든 두려움의 대상들은 빌의 주관이 투사되고 반영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죠.  만약 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주인공이었다면 각각의 두려움의 대상들도 달라졌을 겁니다. 두려워하는 대상 자체가 거의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빌은 빌이고 그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 무서운 걸 무섭지 않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면 바로, 죽음입니다. 빌은 자신 때문에 바로 그 가면 쓴 여자가 죽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더군다나 그녀가 대체 누구였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사실상 이 영화의 수수께끼 같은 여정을 여는 역할을 한 지글로가 빌을 자신의 서재로 불러들여 일종의 데우스엑스마키나 역할까지 자처하게 됩니다. 비밀무도회의 새빨간 카펫과도 같은 색깔의 당구테이블을 따라 이동하면서 지글로는 이 모든 게 ‘게임’이고 일종의 연극과 다름없었다는 식으로 빌에게 해명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르죠. 그것으로 모든 수수께끼는 풀렸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분명하지는 않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지글로는 수수께끼 같은 아버지의 미소로 빌의 등 뒤에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말합니다. Life goes on. It always does, until it doesn't.


 정말로 두려운 게 있다면, 어쩌면 죽음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결국 당신을 속일 수밖에 없고 당신도 나를 속일 수밖에 없는, 우리는 가면과 또 다른 가면을 바꿔가며 죽을 때까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 아닐까요? 이건 영화를 떠나서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빌은 나름대로 생각했겠죠.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앨리스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던 거겠죠. 

 1953년 <Fear And Desire>로 장편영화 데뷔를 한 스탠리 큐브릭은 1999년 바로 이 영화 <Eyes Wide Shut>으로 그의 필모그래피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영화를 만든 직후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빌과 앨리스의 맨해튼아파트는 큐브릭과 그의 아내 크리스티안이 1960년대 함께 생활했던 아파트를 참조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벽마다 즐비했던 예쁜 그림들도 그의 아내 크리스티안이 만든 것들이고요. 관객들로 하여금 톰과 니콜이라는 실제 부부의 레이어를 겹쳐서 바라보도록 의도되어진 이 영화는 실제로는 큐브릭과 크리스티안의 삶 또한 더 깊은 레이어로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누구도 해석하거나 알아낼 수 없겠죠. 적어도 저는 그의 다른 영화들이 그래왔듯 이 영화 역시도 그의 개인적이고 진지한 문제의식이 함께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누군가에게는 20세기 초의 원작을 바탕으로 20세기 말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약간은 고리타분하다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빌과 앨리스처럼 답답하게 괴로워하며 살 게 아니라 헐리우드 스타들처럼 인정할 건 인정하고 당당하게 솔직하게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론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겠지만 다른 하나도 선택이겠죠. 왜냐면 우리는 다음 숏과 다음 씬과 새로운 시퀀스를 꿈꾸고 욕망할 뿐 아니라 스쳐간 기억들, 그 어떤 필름으로도 보존될 수 없는 오직 나약한 서로에게만 남아있는 그것들마저 소중하게 여기니까요. 그래서 그걸 뺏길까봐 무서워하고요.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꿈과 욕망으로 인해. 그래서 답답하게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선택도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할수록 이토록 완벽한 크리스마스 영화는 또 없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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