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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40년 전의 노동자들 <노마 레이>

마틴 리트, 1979


1. 노마 레이(샐리 필드)는 종이에 '노조'라고 휘갈겨서 작업대 위로 올라간다. 


2. 이곳 방직공장에서 일해왔던 그녀는 방금 해고당해서 쫓겨나던 참이었다. 


3. 시끄럽고 밀폐된, 먼지 가득한 공장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해왔던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그녀는 침묵으로 응시한다. 그 얼굴들 중에 그녀의 엄마가 포함되어 있고 그 얼굴들 중에는 이제 그녀의 아빠가 없다. 그는 얼마 전 이곳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다. 오래 전 공장의 먼지 때문에 폐질환을 앓다 죽은 남자의 아내도 지금 노마를 올려다보는 얼굴들 중에 있다. 매일매일 묵묵히 힘겹게 일해왔던 사람들이 작업대 위에 올라선 노마레이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4. 그러나 영화의 감정이 절정으로 흐르는 이 시점에 흔하디흔한 열정적인 연설 따위는 없고 가슴 벅찬 음악도 없다. 방직공장의, 기계의 소음만이 계속 울려퍼진다. 노마 레이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사람들은 노마 레이를 응시한다. 


5. 미국의 실존했던 노동운동가를 다룬 원작을 영화화했다지만 그런 정보 없이 봤다. 그리고 딱히 노동영화라는 의식도 없이, 그냥 영화 속의 인물과 그들의 삶에 집중하고 싶어서 그렇게 봤다. 내가 영화에서 주목했던 부분은 샐리 필드가 연기하는 주인공 '노마 레이'가 순결하고 신성한 '잔 다르크'가 아니라는 점이다.


6. 그녀가 점차 방직공작의 노조설립에 투신하게 과정을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초반(후반까지도) 샐리 필드가 연기하는 '노마 레이'에게서는 성적인 에너지가 물씬 풍긴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가 싶다가 보다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인 그녀는 같은 공장에 일하는 부모와 함께 살면서도 계속 남자를 원하고 남자들을 만나고 있다.(사실 이상한 게 아니라 사람이니 당연한 거다.) 노조결성을 위해 뉴욕에서 이 시골 마을을 찾아온 '루벤'과 만나서 그의 계획에 설득되는 과정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들은 성적긴장이 뚜렷하다. 그러니까 노마 레이가 노동운동에 앞장서는 계기가 정확히 순수했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루벤에게 끌렸고(그렇지만 그에게는 연인이 있었고) 그의 지적인 면모와 뉴욕의 생활 등을 동경하며 그런 복잡한 감정과 그녀의 현실 등이 뒤섞여 점점 그의 이상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7. 그녀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당연히 순수할 수 없는 이런 측면들은 나중에 공장 측에서 그녀를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되기도 한다. 


8. 그리고 가끔, 노조나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에도 그것이 결코 순수하지 않음을 꼬집어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9. 뭐 결국 밥그릇싸움이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10. 맞는 말이다. 결국 밥그릇 싸움이고 그 어느 것도 순수하지 않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이뤄지는 집단 활동(또는 정치적 활동)은 그 어느 경우에도 순수하거나 순결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도 스스로의 내면을 통해 순결하거나 완벽할 수 없다.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 신념을 신성하고 순수한 성질로 기대하거나 포장하려는 심리야말로 교조화의 출발이고 한 개인을 그런 식으로 우상화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11. 예전에 가수 신해철이 죽었을 때 그가 진행했던 고스트스테이션을 다운받아 들었던 적이 있다. 그 중에 예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청취자 사연을 읽고 신해철이 덧붙였던 멘트가, 문득 이 영화를 보다 떠올랐는데 대충 이런 요지였다. '먹고사느라 애쓰다보면 예술 같은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사실 제대로 된 예술이라면 먹고사는 일의 고달픔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12. 예술에 대해 그러한 정의가 성립한다면, '노마 레이'는 예술적으로도 좋은 영화다.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 운동을 신성화하지 않고 그 속에 존재했던 인물들을 우상화하지 않고, 딱히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열등할 것 없는 그들의 먹고살기 위한 노력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40년 시간이 흘러 현실의 많은 조건들이 변하고 바뀌었지만 노마레이와 그녀의 가족, 이웃들은 여전히 영화 속에서 인간적인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다.


13. 영화를 보고나서 혹시나 싶어 확인해보니 역시나... 로버트 드니로와 제인 폰다가 출연한 '스탠리와 아이리스'를 이 영화의 감독 마틴 리트가 말년에 연출했더라. 그 영화도 무척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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