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블레이드러너2049>의 애정서사

드니 빌뇌브, 2017


 1. 블런2049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SF라는 점에는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 같다. 


 2. 이 영화가 유니크한 걸작으로 오래 기억될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3. 블런2049에 별 세 개를 던진 박평식은 '잘 계승했으나 사유의 폭이 넓지 않다'라는 한줄 평을 남겼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사유의 폭이 넓혀졌으면 좋겠다. 훌륭한 시네마토그래피 뿐 아니라 텍스트 자체에 대해서도.


 4. '복제인간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고민한다'는 테마는 얼마나 진부한가.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가 등장했을 당시면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는.


 5. 그 진부한 테마의 진부한 뉘앙스에 한정하여 2049를 바라보거나 평가하기 쉽다. 잘 계승된 속편이라는 외관에 힘입어 일종의 관성으로 영화를 대하는 것. 그러나 2049는 그것과는 다소 이질적인 테마에 집중한 다른 영화다. 결국 K가 데커드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6. 2049의 레플리컨트들은 거의 인간이나 다를 바 없다. 물론 동등한 인간은 아니며, 열악한 환경에서 말단경찰이나 매춘부나 공장일을 하며 살아가는 하층계급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영혼이 없는 껍데기 취급을 당하며 그들끼리의 관계 맺기도 제한적이다. 그들은 출산을 하거나 가족을 이루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현세기 현세대의 현실과 더 가깝게 오버랩된다.


 7. 2049의 레플리컨트들은 타이렐사의 선조 레플리컨트들과도 비교되는데, 선조들이 이룬 출산의 기적은 계승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시스템에 소모되는 존재들일 뿐이다. 이 '출산의 기적'에 대해 영화 속의 다양한 집단들은 상이한 관점을 갖고 있다. K의 상관, 조시로 대변되는 공권력은 이를 계급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영화 후반 집결하는 레플리컨트 단체는 이를 인간의 위상에 도전하는 혁명적 기회로 받아들인다. 이 두 집단은 '인간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복제인간'이라는 20세기적 테마의 연장선에서 대립하지만 21세기의 블런2049에서는 그 존재감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8. 월레스사의 월레스 회장은 이 '출산의 기적'을 애타게 찾아헤매고 있다. 파괴하거나 기적 그 자체로 계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용'하기 위해서다. 거시경제적으로 저출산을 염려하는 현실자본주의 고민까지 침투했는지 몰라도, 그는 '언제까지 만들 수는 없다'며 한계에 봉착한 모습을 보인다. 사실 그는 타이렐사의 모든 기술을 모방하려는 집착에 갇힌, 그 역시도 카피캣으로서의 한계를 지닌다. 그러므로 여성레플리컨트를 번식의 도구로 보는 고대 가부장적이고 잔인한 남성신의 연기를 펼치면서, 자신과 자기 회사의 ‘껍데기스러움’을 극복하려 한다. 


 9. 블레이드러너2049의 블레이드러너 K는 스스로 레플리컨트임을 알고 있고 이미 그 사실에 익숙해져 있다. '복제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고뇌에 집착하기에는 그 자신의 실존적 삶이 너무나 열악하고 계급적으로 천대받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레이트헝거'를 꿈꾸는 '리틀헝거'의 모습에 더 가까운데 영화초반부터 '진정한 관계에 목말라'하는 고독한 일상이 묘사된다. 자신을 가짜라고 껍데기라고 욕하는 사회에서 문 하나를 열고 들어서면 그의 홀로그램 동거녀 '조이'가 기다리고 있다. K와 조이는 20세기의 음악을 틀고 그 시대 연속극에서나 봄직한 중산층 부부를 역할극하는데, 이것이 그가 꿈꾸는 판타지의 소박한 실현이다.(어쩜 현세대의 판타지일수도) 그 작은 공간에서나마 그는 잠깐동안 행복할 수 있다. 그것이 그가 소유한 전부이며 그래서 그 전부에 최선을 다해 조이를 옥상으로 데리고나간다. 둘은 함께 비를 맞는다. 조이는 처음으로 비를 맞는다.


 10. 물론 K는 조이가 월레스사의 공산품임을 인지하고 있다. 분명히 처음부터. 조이가 K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을 표현하려 하자 K는 그런 말할 필요는 없다며 그녀의 마음을 진짜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11. 만약 K가 조이와의 관계에 대한 자기확신,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그에게 그 이상은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을 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친부와 친모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를 충격으로 이끈다. 그는 엄마와 아빠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여정의 목적은 그의 상관 조시나 월레스사는 물론이거니와 혁명을 원하는 다른 레플리컨트들과의 목적과도 불일치한다. 그는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진짜관계(가족)을 원하기에 그들과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12. 이 여정에서 K는 다양한 여성인물들과 만나는데(영화 전반적으로는 K를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이 여배우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모리메이커 아나박사를 제외하면 각각의 여성들과 섹슈얼한 긴장이 흐른다. 상관 조시, 창녀 마리에트, 월레스 사의 레플리컨트 러브까지도. 하지만 K는 그들을 신뢰하지 못하며 심정적으로 밀어내는 듯한 인상이다. 결국 신뢰하고 의지할 이성은 '조이' 뿐인데 그 조이에 대해서도 온전한 자기확신에 이르지 못하기에 계속 찾아 헤매는 것이다. 사실 영화는 멜로적이며 그래서 멜로적인 감성이 충만한 라이언 고슬링이 K여야 했던 것인지도.(더 노골적인 이유라면 라이언 고슬링의 전작 Lars and the Real Girl을 떠올려야 한다. 그 영화에서

라이언 고슬링의 여친 ‘비앙카’를 섹스인형으로 볼 것인지, 연민하여 적당히 이해해 줄 것인지, 아니면 인격으로 대하고 그들의 관계를 인정해 줄 것인지는 마을사람들의 시선과 판단에 달려 있었다. 그 흡사한 테마는 같은 배우를 통해 2049에서 연장되고 심화된다. K의 홀로그램 여친 ‘조이’를 어떻게 바라볼지는 이제 관객들의 시선과 판단에 달려 있다.)


 13. 조이는 왜 K를 돕는 걸까? 물론 죄다 프로그래밍라고 볼 수 있다. 허나 본질적으로 프로그래밍일지라도 조이의 행동반경은 이미 실존적으로 그런 본질을 벗어나 있다. K가 보지 않는 곳에서 마리에트를 질투하며, 자신을 제작한 월레스사의 의도를 간파하고 위험한 선택을 한다.(추적을 피하기 위해 콘솔을 폐기하고 휴대장치로 옮긴다.) 피조물의 모든 행동변수마저도 제작자(창조주)의 의도라고 할 수 있을까? 삶의 모든 실존적 변수들은 근원과 본질로 환원될 수 있을까?


 14. 그렇다면 우리는, 성욕과 식욕 따위의 욕망으로 프로그램되어진, 유전자와 DNA 따위로 퍼스널리티의 변수까지 예측하려는 우리는... 인간성이란 실은 과대평가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어했던 실체가 아니었을지라도, 그럼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믿었던 그 ‘관계성’마저 더는 신뢰할 수 없어지는 것일까?



 15. 자신의 위험한 선택, K를 살려달라 애원하기 위한 더욱 위험한 선택으로 조이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여전히 세상에는 수많은 조이(Joi 그리고 Joy)들이 넘쳐흐른다. 비를 맞으며 K는 거대전광판 또 다른 조이가 거대한 홀로그램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광경에 직면한다. K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사로서 드러나지 않는다. 플래시백도 없지만 조, 라는 이름을 외치면서 조이와의 기억을 플래시백하는 거대한 환상은 그 추억도 거대한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K에게 각성시키는 것일 수 있다. 충분히. 그렇지만 그렇다면 K는 꽤 멍청한 히어로며 영화 또한 지난 세기의 영웅서사를 실패로 뒤바꾼 지점에서 그쳐버린다. 난좀 특별한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넌좀 특별한줄 알았는데 너 역시도... 아니었어. 너와 나 사이의 관계는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어. 


 16. 훨씬 까마득한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줄리 델피가... 에단 호크에게 던졌던 대사를 되새겨 본다면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여기가 아닌(내가 아닌) 여기도 아닌(당신도 아닌) 바로 여기에 존재할지도(당신과 나 사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 그리고 관계 그러므로 증명되지 못하는, 믿을 수 있거나 혹은 믿을 수 없거나의 영역)”


 17. 앞서 말했듯 K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이 가짜임을 인지하고 있다. 처음부터 조이를 광고하는 광고음성이 영화의 앰비언트 사운드에 섞여 흐르며 K가 그런 전광판을 본 것도 처음은 아니었을지도. 유년의 기억마저도 미디어?에 의해 주입된 가짜임을 알았기에 그게 실은 진짜였고 자신에게 진짜 관계가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왔던 것이다. 여행의 결과, 그는 그대로 가짜인 채로 남겨졌다. 그리고 조이마저 잃어버렸다. 비록 그가 그리고 그녀가 가짜에 불과했을지언정 그녀와 함께한 기억조차 가짜였을까? 어쩌면 이제 K는 조이를 이해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왜 자신의 여정을 도왔는지.


 17. K가 인간에게 열등한 존재였다면, 조이는 레플리컨트인 K나 마리에트보다 열등한 존재였을 것이다. K가 '소울'이 부재한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다면, 조이는 그 껍데기마저 부재함에 열등감을 느꼈을 수 있다. K와 달리 조이는 스스로 꿈을 이룰 수 없음을, 자기존재의 현상태를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대신 K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그를 도왔다면. 정말 그랬다면 그녀는 K에게 자신을 이입한 것이고 그녀와 그 사이에는(그녀와 그가 제조품에 불과했을지라도) 공감과 이해의 교류, 둘 만의 관계는 실재했던 것이다.


 18. K가 거대전광판에서 부활한 또 다른 조이와 직면하기 전 장면, 데커드는 월레스에 의해서 부활한 또 다른 레이첼과 직면한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둘 다 진짜일 수 없다면 둘 다, 모든 게 가짜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지... 데커드는 과거 레이철과 함께했던 관계의 진실성에 대해 시험당하고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응답한다. 이제 K의 차례다. 하지만 그는 입밖으로 말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침묵 속에서 선택하고 선택한 대로 행동한다. 이제 관객이 응답해야 할 차례다. K가 말하지 않은 진실은 무엇인지, 그는 무엇을 선택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    


 19. 나의 관점에서 K는 조이와 같은 길을 걷기로 선택한다. 그는 더 이상 꿈꿀 수 없게 되었고 가족을 찾을 수도 없게 되었지만 대신 데커드가 딸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조이가 K를, K의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처럼. 데커드가 질문한다. 이렇게 도와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K는 대답하지 않는다.


 20. 계단에 쓰러져 누운 K가 손을 펼쳐 '눈'을 느끼는 마지막 장면은 82년작 블레이드러너의 엔딩을 추억하게 한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K의 마음속에는 처음 ‘비’를 맞으며 손바닥을 펼쳐 빗방울을 느낀 조이와의 추억이 떠올랐을지 모른다. 비록 유년의 기억은 자기 것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조이와 함께 했던 기억만은... 차가운 눈처럼 식어가는 그가 유일하게 관계 맺었던, 온전한 자기 것의 따스함이다. 


 21. 20세기의 <블레이드러너>가 인간과 레플리컨트의 대립, 대조를 통해서 인간적인 정체성을 고민했다면, 21세기의 <블레이드러너2049>는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막론하고 자기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인물들 틈에서... 그렇다면 가짜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맺는 관계는 진짜일 수 있는지, 바로 그 관계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적어도 그 관계가 진실할 수 있다면 인간다움은 나와 네가 아닌 그 사이에서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나는 영화가 의도했던 테마일 거라고 어느정도 객관적인 수준까지도 자신한다. 더 나아가 K와 조이의 내면을 헤아리고 그들의 관계를 긍정하는 수준은 나의 주관적인 감상에 힘입었을 거라 인정한다. 어쩜 그래서 영화가 의도한 수준을 넘어섰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그것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조주의 의도가 내가 느끼고 받아들인 것까지 바꿔놓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난 여전히 K와 조이의 관계를 긍정할 것이다. 우리는 아주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를 살아간다. 무수한 정보들은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고 우리가 맘먹으면 언제라도 많은 것들을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가끔은 나 스스로 모호한 내 것을 정의하거나 믿어야 할 때가 온다. 예를 들어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나의 사랑은 결국 내가 정의 내려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이 영화를 K가 가족을 찾는 여정이 데커드가 가족을 찾는 결말로 향하는 일종의 애정서사로 기억한다. 한편으로는 조이가 K의 가족을 찾는 여정을 돕는... 또 K가 데커드의 가족을 찾도록 돕는 애정서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는 현실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 불운하게 종결된 관계를 곱씹으며 그래도 그 관계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치부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내게 가르쳐준 뭔가를 나도 다른 사람에게 진실로 실천하고 싶어졌으니까.


//2020년 봄에 썼던 글을 2021년 겨울에 정리하고 보충함 

작가의 이전글 <달콤한 인생>에 관한 에세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