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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달콤한 인생>에 관한 에세이

페데리코 펠리니, 1960


 수많은 여자를 추구하는 남자는 두 범주로 쉽게 나뉠 수 있다. 한쪽은 모든 여자에게서 자기 고유의 꿈, 여자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찾는다. 다른 쪽은 객관적인 여성 세계가 지닌 무한한 다양성을 수중에 넣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첫 번째 부류의 집착은 낭만적 집착이고, 그들이 여자에게서 찾는 것은 그들 자신, 그들의 이상이며 그들은 항상 끊임없이 실망한다. 왜냐하면 이상이란 우리가 알다시피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로 옮겨 다니게 만드는 실망은 그들의 바람기에 일종의 멜로드라마 같은 변명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수많은 감상적인 부인네들은 그들이 지닌 불치의 일부다처주의를 감동적이라 생각한다. 

 또 다른 집착은 바람둥이형 집착이며 여인들은 여기에는 감동적인 것이라곤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여자들에게 주관적 이상을 투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그 어느 것에서도 실망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실망하지 못하는 태도 그 자체는 뭔가 추태의 요소를 포함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바람둥이의 집착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왜냐하면 이 집착은 실망을 통한 죄의 사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물론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 ‘마르첼로’는 부정할 수 없는 바람둥이다. 그런데 바람둥이로서 그가 가진 집착은 완벽한 이상형을 추구하는 낭만적 집착일까? 아니면 다양한 여자들의 다양한 개성 자체를 수집하고픈 바람둥이형 집착일까? 

 세 시간 남짓한 이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여러 번의 환락의 밤이 등장하고 그때마다 여러 번의 공허한 새벽이 뒤따른다. 미지의 가능성들로 반짝이는 로마 밤거리를 따라 마르첼로는 머릿속이 희뿌연 정액으로 젖은 것처럼 방황하다 문득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새벽을 맞이한다.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물론 여자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대체 뭐가 문제길래 아무리 찾아도 가져도 또 찾고 또 가져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느냐는 것이다. 단언컨대 이 문제는 마르첼로만의 문제는 아니다.)


 마르첼로는 기자다. 정확히는 가십칼럼니스트. 상류층이나 셀럽들의 ‘달콤한 인생’ 주변을 하이에나처럼 맴돌고 또 그의 곁에는 파파라초 같은 카메라 문 하이에나들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덕분에 그는 언제나 멋지고 새로운 여자를 만날 기회가 있다. 영화처음 그가 지하나이트클럽에서 만나는 막달레나가 바로 그런 부류 부유하고 아름답고 세련된, 한밤중에도 걸핏하면 선글라스를 쓰는(마르첼로와 마찬가지로) 여자다. 나이트클럽을 빠져나온 마르첼로와 막달레나는 거리에서 마주친 창녀와 동행하여 그 여자의 누추한 집을 방문한다. 그곳은 침수된 물이 빠지지 않아 바닥이 첨벙거리는데 그 방 침대에서 막달레나는 마르첼로에게 사랑을 나누자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둘은 창녀에게 후한 방값을 쳐주고 쿨하게 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좀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쪽은 막달레나다. 그녀는 바람둥이형 집착에 가까워 보인다. 그녀가 창녀의 집에 가자고 해서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자고 한 것은 뭐랄까, 기생충의 박사장이 기정의 싸구려팬티에 보인 집착을 연상시킨다. 더 나아가 박사장 부부가 아직 물이 흥건한 기택네의 반지하방에 쳐들어가 정사를 나누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가난함과 초라함을 흥미로운 삶의 다양성으로서 맛보려 한다면... 막달레나는 아무것도 실망할 게 없다는 태도로 다만 이 순간을 즐기려했다. 그런 그녀의 제안을 마르첼로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받아들였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컴컴한 로마의 밤을 모험하는 그들은 유사한 남녀처럼 여겨진다.

 마르첼로에게 다음으로 나타난 여자는 이탈리아를 찾아온 헐리우드 배우 실비아다. 마르첼로는 기자로서 그녀를 따라다니지만 실은 그녀를 여신처럼 우러러본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실비아가 타잔 역을 했던 배우 남편과 다투고 뛰쳐나간다. 마르첼로는 그녀를 쫓아 다시 그녀와 함께 로마의 밤거리를 헤맨다. 아름다운 실비아는 문득 거리의 개짖는 소리에 귀 기울이더니 고개를 쳐들고 우우 흉내를 낸다. 마르첼로는 차마 동참하지는 못하고 쳐다만 본다. 갑자기 그녀는 길바닥에서 아기고양이를 주워 이번에는 야옹야옹 흉내를 낸다. 그러더니 마르첼로에게 우유를 사오라고 한다. 마르첼로가 우유를 구해 돌아왔더니 아기고양이는 내팽개쳐져 있고 실비아는 분수대 안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면서 놀고 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녀가 들어오라며 손짓한다. 마르첼로는 들어간다. 이 모든 게 관찰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지만 마르첼로는 관점이 다른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가 이토록 천진난만하다니... 감명한 기색으로 열심히 그녀와 물장구를 친다. 불시에 무대조명이 켜지듯 새벽이 밝아진다. 자아도취에 빠져 현실에서도 혼신의 연기를 펼친 여배우는 유일한 관객을 남겨둔 채 퇴장해버렸다.

 마르첼로는... 낭만적 집착을 가졌다. 분명해 보인다. 관객의 눈에는 대중들의 찬사에 부풀어 둥둥 떠다니는 풍선 같은 젖가슴의 여배우에 불과한데 (또 다른 관객인)그의 눈에는 여성성의 총체, 화신인 양 황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녀와 함께했던 황홀했던 꿈은 급작스럽게 끝나버리고 이제 그녀의 타잔남편에게 줘터져서 쓰러진 그의 귓가엔 지난밤 개처럼 짖던 그녀의 아련한 음성만... 개꿈 같은 흔적만이 맴돈다.

 현실에 비춰보자면 바람둥이형 집착과 낭만적 집착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마르첼로가 그러하고 마르첼로 뿐 아니라 다른 바람둥이들이 그러하고 또 바람둥이가 아닌 다른 사람들 또한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마르첼로의 경우 영화에서 그가 지닌 낭만적 집착이 더욱 부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계속 지켜볼수록 알게 된다. 영화를 계속 지켜볼수록 단순히 그가 여자에 대해서만 그렇지 않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미리 말해두자면 그는 자신의 삶 전반에 대한 낭만적인 이상을 머릿속에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머릿속의 희뿌연 정액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뿐이고 텅 빈 새벽 텅 빈 가슴에 더는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영화의 오프닝과 직후의 시퀀스에는 종교적 상징이라 할 법한 게 등장한다. 헬기에 매달린 예수상과 지하나이트클럽에서 불상 비슷한 가면을 쓰고 공연하는 모습. 그게 숭고한 종교적 이상이라기보다 현실과 괴리된 채 하늘높이 떠다니거나 눈요깃거리로 전락한 풍경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시퀀스들에서 마르첼로가 품은 낭만적 이상은 캄캄한 로마의 밤거리에 깊게 침잠하여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낮의 풍경을 연출하는 또 그 다음의 시퀀스들에서 부활하고 마르첼로의 내면에서 갈등하고 충돌하게 된다. 바로 이 내적갈등과 현실의 충돌이 영화 전체적으로 일관된  대립적 구도를 형성한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여러 시퀀스나 에피소드가 다소 산만하게 흩어진 인상이었다. 영화를 두 번 보고 세 번 보면서 그 시퀀스들이 마르첼로의 마음에서 충돌하고 갈등하는 그의 고민을 따라 은밀한 기승전결을 이루고 있음을 깨달았다. 당장 핵심적으로 여겨지는 시퀀스들만 간추려 연결시켜보면 아래와 같다. 


 1. 막달레나와의 데이트(밤)

 2. 마르첼로의 동거녀 엠마의 자살시도(낮)

 3. 실비아와의 데이트(밤)

 4. 마르첼로의 친구 스타이너와의 대화(낮)

 5. 성모가 출현했다는 시골마을의 일화(낮과 밤 그리고 아침)

 6. 엠마와 함께 스타이너의 집을 방문(밤)

 7. 집필을 시작하는 마르첼로, 소녀와의 만남(낮)

 8. 마르첼로 아버지의 방문(밤)

 9. 귀족의 성에서 막달레나와 재회(밤 그리고 아침)

 10. 엠마와의 다툼 그리고 화해(밤 그리고 새벽)

 11. 스타이너의 집에서 일어난 일(낮)

 12. 이혼한 친구 집에서 광란의 파티(밤)

 13. 해변에서 다시 그 소녀와의 해후(낮)


 이를 통해 도식화를 해보겠다는 게 아니다. 잘 되지 않을뿐더러 자신도 없다. 그냥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내 감상과 내 수준에 걸맞게 충실하게 복기하고 싶을 뿐이다. 너무나 오래되고 유명한 영화라서 다들 당연하게 그건 이러저러한 영화야, 라고 일축해 버리거나 아님 잘 모르겠는데... 양극단으로 나뉘곤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영화를 많이 말하고 싶고 또 쉽게 떠올리며 쉽게 써내려갈 수 있다.(좋아하기 때문에)

 이 시퀀스들 혹은 에피소드들의 구성은 시간을 따라 또 마르첼로의 고민을 따라서, 낮과 밤으로 대조적인 이미지들과 낭만적이상 대 냉소적현실이 충돌하는 마르첼로의 갈등과 더불어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흐름을 나타낸다. 시퀀스1에서 막달레나와 밤을 보내는 마르첼로가 그려질 때 보이지 않는 그의 집에선 동거녀 엠마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시퀀스2 달콤한 꿈으로부터 귀가한 마르첼로는 엠마가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맞닥뜨린다. 그는 엠마를 끌어안고 내 사랑이라고 울먹이지만 병원에서 엠마가 살아나자마자 막달레나에게 전화를 건다. 시퀀스3의 역시나 마찬가지로 달콤했던 꿈에서 깨어난 후 시퀀스4에서는 환한 대낮 마르첼로는 친구 스타이너를 만난다. 스타이너는 마르첼로를 고즈넉한 성당 내부로 이끈다. 지적이고 평온한 스타이너의 공간으로서 성당은 고결한 종교적 이상이 훼손되지 않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스타이너는 마르첼로를 격려하고 마르첼로가 품은 낭만적 이상, 작가의 꿈을 북돋아준다. 그런데 왠지 마르첼로는 그 앞에서만큼은 조심스럽고 약간 위축된 모습이다. 스타이너가 오르간을 연주할 때 카메라는 마르첼로의 표정에 담긴 심경의 변화를 주시한다. 바흐의 선율이 그를 꾸짖기라도 하는 양 마르첼로는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리며 생각에 잠긴다.

 이런 내면의 동요는 시퀀스5를 한층 종교적으로 극단화된 공간으로 이끈다. 성모의 출현을 목격했다는 꼬마들로 인해 수많은 군중과 취재진이 시골마을로 몰려들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허공을 가리키며 뛰는 꼬마들을 쫓아 군중과 취재진이 난장판을 벌이는 광경은 시퀀스3에서 마르첼로가 실비아라는 꿈을 추격하던 광경과 겹쳐진다. 하지만 성모를 영접하려 모인 그들모두를 매도할 순 없을 것이다. 마르첼로와 엠마는 병든 딸아이를 안고 기도하는 어머니를 발견한다. ‘죽으면 안 된다. 아가. 성모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실 거야.’ 나는 지금도 그 대사를 잊을 수가 없다. 

 폭우가 몰아쳤던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마르첼로와 엠마는 성모의 출현이 아닌, 끝내 죽어버린 딸아이와 남겨진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한다. 이 안타까운 장면은 쉽게 가셔지질 못하고 다음 시퀀스6에서 상반된 데자뷰처럼 되돌아온다. 스타이너의 집을 방문한 마르첼로와 엠마는 아프지 않고 건강한 딸과 아들이 스타이너 부부의 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모습을 목격한다. 비록 밤이지만 집안은 환하고 따스하고 더없이 평화롭다. 바깥세계의 거친 폭풍우는 손님들과 함께 실내레코드로 감상하며 신비로운 정취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마르첼로는 마음 한 켠의 영웅처럼 스타이너를 바라본다. 그는 지혜롭고 완벽한 가장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가정을 이루었다. 마르첼로는 그를 부러워하며 그리고 존경한다. 

 어떻게 마르첼로 같은 남자가 스타이너 같은 남자를 존경할 수 있냐고 의아해할 수 있지만 사실 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다.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무분별한 일부와 별개로 완벽한 가장과 아름다운 가정을 동경하고 부러워하고 진심으로 존경해마지 않는다. 왜냐면 그게 꼭 완벽해서 만이 아니라 그들 눈에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다져진 미학적 가치관은 종종 도덕적 가치관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이미 도덕을 뛰어넘은 남자(여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 눈에 자기 스스로를 추하다고 느끼도록 만든다. 그래서 스스로를 경멸하게 되고 혐오하게 되고 겉으로 티는 내지 않더라도 점점 고독해진다. 설령 그런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한들 그리고 그 사람을 자신도 사랑한다한들 오히려 사랑하면 할수록 서로의 자아가 뒤섞이고 상대방을 자기 일부로 바라보기 때문에 못생긴 거울같은 상대방을 떨쳐버리고 싶어진다. 마르첼로가 엠마에게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있다면, 실현될 수 없을 것 같은 그 꿈을 견고한 현실 내에서 실천해 보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희미한 비전이자 어쩌면 나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롤-모델이 될지 모른다. 스타이너에게 자극받고 격려 받은 마르첼로는 이어지는 시퀀스7에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삶을 시도한다. 환한 대낮 카페에서 타자기 앞에 앉은 그는 거기서 일하는 소녀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그 소녀는 티 없이 맑고 정말 순수해 보인다. 그 해맑은 소녀가 마르첼로에게 어렴풋한 절망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자신은 결코 저런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당연하다. 시간은 거역할 수 없고 변한 건 변해버린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마르첼로는 너무 쉽게 타자기에서 손을 놓아버린다. 

 좀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시퀀스7의 잔상 역시 그대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시퀀스8에서 마르첼로가 그를 찾아온 아버지에게 보이는 친절함과 관대함은 효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를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같은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나이 든 사람이 그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절망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마르첼로가 그 소녀에게 실현할 수 없었던 잠재된 욕망을 아버지를 통해 대리충족하려 든다는 위험한 추측까지 해볼 수는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자세히 관찰하면 마르첼로는 끊임없이 아버지 눈치를 살피면서 그의 심중을 헤아려서 따라가 주려 노력한다. 카바레에 간 것도 쇼걸을 동석시킨 것도 아버지가 내심 원하고 있으리라 그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는 젊은 쇼걸과 마주앉아 남자로서의 호기를 부리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을 말없이 서글픈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서글픈 시선은 마르첼로 스스로를 향한 것이기도 한데 그는 그 절망에서 쉽사리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왜 쉽게 바뀌지 못하는 것일까? 

 시간은 그토록 쉽게 사람을 바꿔놓아 절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확정지어버리는데 왜 나는 나 한 사람을 바꾸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그렇게 질문하며 절망한다. 그 절망이 더욱 두꺼운 이 되어 또 그 앞에서 절망한다. 

 시퀀스9

 마르첼로는 우연히 어느 귀족의 성에 초대받는다. 거기에 모인 방탕하고 자유로운 상류층들 틈에서 우연히 그 중 한 명 막달레나와 재회한다. 마르첼로는 두꺼운 을 사이에 두고 막달레나와 단 둘이서 대화한다. 막달레나의 목소리가 벽을 뛰어넘어서 장난하듯 나와 결혼하지 않겠느냐고 물어온다. 당연히 마르첼로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다.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고 창녀처럼 즐기고 싶어. 하지만 난 한 가지만을 선택하지 못해. 지금까지 그래왔고 난 어쩔 수 없는 창녀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자 마르첼로는 (다소 어이없게도)그녀의 말에 진지하게 응답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고, 나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는 식으로...’ 거기까진 확실하지 않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 마르첼로는 두꺼운 벽 너머 막달레나에게서 정확히 자신과 같은 에 봉착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누군가와 소통한 것이고 잠시나마 고독하지 않은, 서로의 어글리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이해받은 순간에 감동한 것이다. 자칫 이 장면을 예의 홍상수 식의 조롱과 풍자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데(따지고 보면 그의 영화들도 그렇게 조롱하거나 풍자하지 않는다. 이따금 관객들이 자학적으로 웃어댈 뿐) 그렇지 않다. 결과적으로 막달레나가 마르첼로를 농락한 해프닝으로 끝나버리지만 사실은 그 농락 속에는 그녀의 진심이 섞여있었고 바보 같은 그의 응답 역시 진심이었다. 그조차도 사랑의 시작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잘 모르겠음에도 그걸 선택해야만 하는 실존적 문제다.(실존이란 단어는 이럴 때 사용한다.)


 그럼 왜 지금 이 순간에도 마르첼로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엠마는 아닌 것일까?

 왜 마르첼로는 확실히, 그를 사랑하는 그녀와는 새롭게 시작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냉정하게 말해서 답은 간단하다.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된 연인 사이 서로에 대한 이성적인 욕구나 감정이 소진되는 것은 흔한 경우다. 더 나아가서는 숙명이다. 그 필연적 과정을 두고서 더는 사랑하지 않으니 이제 그만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겠지만 아마 숙명은 반복될 것이다.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처럼. 그리고 천천히 그 자체로 소진될지도 모른다. 소중했던 무엇인가가... 뭐 아직 직접경험에 있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내가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건 주제넘은 짓 같다. 마르첼로도 이 정도는 알고 있거나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 그에게 있어 엠마라는 존재는 그가 상처 입히고 파괴한 역사적 증명이며 자기 죄를 직면해야 하는 증거라는 현실이다. 여전히 아름답고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그가 새롭게 시작하기에 엠마라는 폐허는 적절치 않았을지도 모른다.(그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둘은 싸운다. 

 한밤중 도로 한복판 차 안에서 대차게 싸운다. 그동안 서로가 쌓아왔던 서로에 대한 원한을 토하듯이 쏟아낸다. 급기야 마르첼로는 엠마를 쫓아내다시피 하고 혼자 차를 몰고 달아나버린다. 한밤중 도로 한복판에 그녀를 혼자 남겨둔 채로. 하얗게 밝아오는 새벽 마르첼로는 돌아온다. 엠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큼 차에 올라탄다. 그는 왜 돌아왔을까?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해서 돌아왔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절대 아름답지 않고 절대 완벽하지 않은 그것이 사랑이라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르셀로의 경우에는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그 또한 하나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모든 걸 바꿔놓는다. 언젠가 스타이너가 마르첼로에게 했던 말처럼.


 이어지는 시퀀스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할 게 없다.

 나에게 있어 영화의 그 지점, 새하얀 대낮에 벌어진 그 사건은 백지와 같다. 

 여백이다. 이해할 수 없다. 딱 하나 못박아 두고 싶은건 스타이너는 가식적이라거나 위선적인 인물이 결코 아니라는 것. 그는 마르첼로를 진실하게 대했다. 말할 수 있는 진실만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그 사건이 이 영화의 가장 깊숙한 블랙홀처럼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동안의 모든 걸 빨아들이듯 그 이후의 많은 걸 바꿔놓았다. 바로 그 다음 시퀀스에서 마르첼로는 정말 변해버린 것처럼 나타난다. 

 그는 변했을까? 정말? 하지만 그는 이혼한 친구의 집에서 말 그대로 밤새도록 벌어지는 그 광란의 파티에서조차 여전히 아직까지도 절망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여준다. 술에 취해 친구들을 모욕하고 자기혐오와 부끄러움의 반작용으로 그 모든 우스꽝스런 광대짓을 일삼는다. 그의 곁에는 엠마도 막달레나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로 오로지 시간이란 강력한 힘에 의해서만 변한 모습으로, 시간이란 거대한 조류에 휩쓸려 떠돌다가 여기까지 떠내려 온 것이다. 

 엔딩시퀀스

 해변으로 걸어 나온 마르첼로와 친구들은 조류에 떠밀려 와 결국 어부들의 그물에 끌어올려진 커다란 가오리 같은 생물을 발견한다. 그게 뭐였든지 간에 그것은 이미 죽어있다. 그것의 새까맣고 텅 빈 눈동자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멀리 건너편... 카페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마르첼로를 향해 손을 흔든다. 오프닝시퀀스에서 헬기에 탄 마르첼이 옥상의 여자들에게 전화번호를 따려 했건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르첼로는 소녀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소녀는 손짓으로 타자기를 치는 시늉을 한다. 마르첼로는 알아들을 수 없다. 

 마르첼로는 고개를 내저으며 힘없이 뒤돌아서 걸어간다. 

 소녀는 해맑게 미소 지으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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