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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침묵>

잉마르 베리만, 1963


 열차 객실문에 쓰여있는 낯선 외국어를 가리키며 소년이 질문한다.

 '무슨 뜻이에요?'

 객실문 바로 옆에 앉은 에스타는 '모르겠어.'라고 힘없이 대꾸한다. 이 영화의 첫번째 대화다.


 에스타와 그녀의 동생 안나 그리고 안나의 아들 요한

 이렇게 두 여인과 한 소년이 열차를 타고 낯선 도시에 간다.

 그곳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에스타의 직업이 번역가라 여러 언어를 할 줄 알지만 그곳은 영어도 프랑스어도 독일어도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낯선 도시의 호텔에 머무르게 된 세 사람에게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그들 세 사람 뿐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 호텔방 안에서는 그들 사이의 대화보다 그들 사이의 침묵이 훨씬 더 넓은 텅 빈 공간을 차지한다.

 에스타는 아프다.

 심각한 발작이 엄습하면 그녀는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겁에 질리며

 지적이며 자존심 강했던 일생의 모습답지 않게 아이처럼 외로워한다.

 이순간 곁에 있어줄 누군가를 간절히 필요로 하건만 동생 안나는 밖을 쏘다니고 안나의 아들 요한은 (엄마의 부재에)휑한 호텔복도를 방황한다.

 이순간 안나는 언니 에스타와는 전혀 다른 삶의 조건에 놓여있다.

 조금씩 생명이 식어가는 에스타는 춥다고 하는데

 몸속에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안나는 호텔방의 열기를 못견뎌한다.

 안나는 건강한 육체를 드러낸 짧은 옷을 입고 낯선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녀는 이순간 오직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을 찾고있다.

 결국 두 여자 각각은 각자 원했던 것을 서로가 아닌 낯선 이국의 남자에게서 얻을 수 있다.

 에스타는 말이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 호텔의 늙은 웨이터?남자에게 친절한 보살핌을 받는다.

 안나는 말이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 식당의 젊은 웨이터?남자와 격렬하게 몸을 섞는다.

 에스타와 안나 두 자매가 가끔 보여주는 대화는

 서로에 대한 이해보다 오해를, 서로 간의 해묵은 갈등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반면 간단한 대화조차 힘든 이국의 남자와 함께했던 침묵은 (잠시나마) 그녀들 각자에게 간절히 원했던 것을 가져다줬다.


 두 여자가 완전하게 상이한 존재라고 볼 순 없을 것이다.

 겨우 발작이 가라앉은 에스타는 침대에 누워 눈감고 자위를 한다.

 섹스가 끝난 컴컴한 방에서 안나는 한 마디도 이해못할 남자에게 언니에 대한 원한?을 털어놓는다.

 두 여자는 당장 상이한 삶의 조건에 놓여졌을 뿐이며 당장은 어떻게든 위안을 얻었으나

 곧 불행해지고 불완전해진다. 에스타는 다시 술과 담배로 스스로를 달랜다. 안나는 육체만 함께 있는 남자에게 공허한 혼잣말을 하고 있다.


 두 여자 사이 요한이라는 소년도 두 여자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외로움을 겪고 있다.

 다만 아직은 '외로움'이라는 단어의 분명하고 절실한 뜻을 자각하지 못한 것 같다.

 영화의 시종 요한이 애타게 찾아 헤매는 것은 엄마 안나의 존재다. 요한은 젊고 아름다운 엄마를 여신처럼 숭배하고 따른다.

 영화에서 안나 역을 말은 군넬 린드브룸의 젖가슴이 클로즈업된 샷이 몇 번 나온다.

 흑백의 음영으로 둥그렇게 도드라진 그녀의 젖가슴은 그녀 존재를 휘두르는 육체성, 욕망의 이미지이면서

요한이 갈구하는 모성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요한은 스스로 확실하게 해석할 수 없는 상실감을 껴안은 채

 호텔을 방황하면서 저마다 고독한 삶의 조건에 놓인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작은 방에 틀어박혀 앉아 홀로 말없이 식사하는 늙은 웨이터를 요한은 멀찍이 바라본다.

 침대에 누워있는 에스타에게 다가가 그녀가 홀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다.

 이 영화에 대해 구원이라거나 신의 부재라거나 거창한 얘기를 할 수 있겠으나 가장 먼저 관념에 앞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정서는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외로움'이다.

 각자의 외로움에 갇힌 사람들이 서로에게 딱히 어떤 말로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장면은

 이 특별한 영화밖에서도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진부한 삶의 현실이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영화가 아주 흥미진진하다고 할 수 없었음에도 흑백의 샷 하나하나가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었다.

 다시 보고나서 그 하나하나의 이미지가 침묵으로 전달했던 실체가 진부하면서도 특별한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영화 전에 만들어진 잉마르 베리만의 여러 작품들이 연극적인 재미가 도드라지는데

 이 영화는 촬영 그 자체로 영화적인 아름다움이 부각된다. 물론 연극적인 요소는 일종의 무언극으로서 여전하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무성영화같은 표현력이 함께하고 '비브르 사 비'나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 같은 흑백영화에서 느꼈음직함 모던한 아름다움이 있다.

 에스타 역을 맡은 잉그리드 추린의 연기가 그때나 지금이나 매우 인상적인데

 이 글을 쓰면서도 에스타가 호텔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에스타는 낮에 한 번 그리고 또 밤에 한 번

창밖 거리에서 거대한 짐수레를 (혼자서) 끌고가는 늙고 지친 말을 발견한다. 에스타가 실은 형이상학적인 무엇보다 안나와 다름없이 어떤 육체성, 허나 쇠퇴해가는 육체의 거대한 고통을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음을 감안하면 그녀가 그 불쌍한 말을 보며 어떤 심정이었을지 여렴풋이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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