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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모래의 여자>

테시가하라 히로시, 1964


 딱히 벌레들에게 매료된 적은 없는 것 같다만 

 만약 내가 열정적인 곤충채집가의 입장이라면 파리나 모기나 흔해빠진 나비 따위를 찾아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난 좀 더 특별한 벌레를 원할 것이다.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형태에서 진화를 거듭한 말하자면 변종이겠지. 변종은 평범한 환경에서라면 변종이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역시 특별한 환경, 생존에 까다롭고 척박한 환경이기에 그 곳에서 순응하고 적응하고 진화한 결과로서 특별한 벌레가 된 것이다. 그럼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교사이자 열정적인 곤충채집가인 이 영화의 주인공 남자는(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바닷가 외딴마을의 사막지대를 찾아간다. 인적이라곤 없이 모래땅만 펼쳐진 이곳에서 남자는 수포딱정벌레라는 걸 발견하길 기대한다. 하지만 별 소득 없이 해가 저물고 차편도 끊겨버린 상황에서 마을노인이 나타나 근처 민박을 권유한다. 남자는 노인을 따라간다. 노인은 사막 가운데 거대한 모래구덩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2~3층 높이쯤 돼 보이는 저 깊숙한 아래, 그러니까 모래구덩이 속 버티고 있는 초라한 나무집을 가리켜 보인다.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줄사다리를 타고 모래구덩이 밑바닥으로 한 발 한 발 내려간다. 

 <모래의 여자>는 기본세팅부터 다분히 우화적이다.(상식적으로 보자면) 그런데 막상 모래구덩이 속 나무집으로 들어간 남자의 눈에 비친 집안내부는 초라한 삶의 흔적이 역력한 현실적인 미장센을 보여준다.(어쩌면 저 때는 저런 곳이 있었을지도... 싶다.)

그 집은 젊은 여자가 홀로 살고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밥을 차려준다. 남자가 밥을 먹는데 머리 위에서 모래가 떨어진다. 여자는 습기 때문에 지붕이 썩어들어 그렇다며 남자의 머리 위에 우산을 달아준다. 나름 과학적 소견이 있는 남자는 사막에 습기가 웬 말이냐고 코웃음 친다. 나중에 그는 자던 도중에 깨어나 캄캄한 집밖에서 여자가 삽질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여자는 삽질을 잘한다. 여자가 통에 담은 모래는 밧줄에 매달아 구덩이밖 마을주민들에게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남자가 일어나보니 여자는 벌거벗은 맨몸으로 잠들어 있다. 남자는 짐을 챙겨서 나오지만 구덩이를 빠져나갈 수 있는 줄사다리도 밧줄도 보이지 않는다. 


 이쯤 오면 주인공을 폐쇄된 공간에 몰아넣고 무사히 탈출할지를 지켜보는 스릴러의 조건이 갖춰졌다. 그런데 영화는 침착한 호흡을 유지한다. 음산하게 스며드는 음악은 서스펜스보다 미스터리에 가까운, 점점 심연으로 가라앉는 기분이다. 주동인물과 반동인물 사이의 투쟁은 섣불리 격화되지 않고 구덩이 안과 밖의 대립보다는 구덩이 속의 남자와 여자가 보여주는 상반된 태도에 영화는 집중한다. 여자는 남자가 여기 남아서 생활하며 모래를 구덩이 밖으로 올려 보내는 일을 함께해주기를 원한다. (모래를 실어 내보내지 않으면 그 대가로 식량과 물을 받을 수 없을 뿐더러 점점 쌓여가는 모래에 언젠가 파묻히고 말것이다.) 남자는 어떻게든 구덩이를 빠져나가려 한다. 하지만 그가 구덩이의 경사면을 기어오르려 할수록 모래가 흘러내려 그를 가둔다. 즉 시지프 신화 같은 한계에 봉착했다. 여자는 묵묵히 삽질하며 남자가 현실을 받아들이길 기다린다. 남자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여자는 오랫동안 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왔고 모래 때문에 남편과 아이까지 잃어버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 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삽질을 할 뿐이다. 남자의 눈에 이건 말 그대로 삽질이다. 무의미한, 도저히 인간의 삶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벌레 같은. 



 영화는 스릴러보다는 섹슈얼한 텐션이 가득하다.    

 여자는 평범한 외모에 팜 파탈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다만 온순한 성격이다. 허나 모래의 습기 때문에 나체로 잠든 여자를 응시할 때, 카메라는 여자의 몸 여기저기에 들러붙은 모래들을 샅샅이 훑어 내린다. 구덩이에 둘만 남은 여자와 남자의 필연처럼 남자와 여자는 결국 몸을 섞는다. 정사 전 남자가 여자의 맨살에서 모래를 털어주는 장면을 천천히 클로즈업하여, 침묵과 거칠어져가는 호흡으로 긴장을 고조시킨다. 그 흑백의 모래알갱이 하나하나에까지 이입하게 되는, 그래서 여자의 몸이 촉각화되는 순간까지 이르게 된다. 인간 공감능력의 위대함이라 해야 할지, 내 성욕의 대단함이라 해야 할지... 촬영의 훌륭함이라고 해두자. 정사가 끝날 무렵 갑자기 비탈을 부드러운 체액처럼 미끄러지는 모래의 결을 담은 숏이 따라붙는다. 멋진 연결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는 여자의 굴곡진 몸과 사막의 곡선을 오버랩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 척박한 환경에 순응하고 적응하여 진화한 특별한 존재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녀와 몸을 섞은 것은 단순한 교합 그 이상의 교합이다.  

 물론 남자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남자의 관점에서 이 구덩이에 안주한다는 것은 스스로 벌레이기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관점에서 그녀는 결코 스스로를 벌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집(구덩이)에 머무르고 싶고 다만 외롭기 때문에 남자가 떠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관객은 여자와 남자 둘의 관점을 오갈 수 있지만 특히 오늘날 관객이라면 남자처럼 여자의 ‘긍정’을 수용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왜냐면 여자의 순응하고 적응하는 모습이 고전적인 즉 수동적인 여성상을 대표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남성적 시선으로 성적 대상화된 나쁜 영화의 그릇된 예시처럼 비춰질 가능성도 다분하다. 정확히 말하면 남자는 자신과 대립적인 이 환경, 사막과 모래를 대상화하며 그 환경에 상반된 태도, 즉 그곳과 함께하려는 여자를 묶어서 대상화한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외로움을 덜어줄 필요로서 남자를 대상화한다.(대상화라는 개념은 영화는 물론 현실에서 우리 모두가 숨 쉬듯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인데, 특정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남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자의 ‘긍정’을 남자는 ‘긍정’해줄 수 있을까? 관객들은 함께 긍정할 수 있을까? 남자가 혹은 관객들이 여자를 주체적이지 못한 구속된 상태라고 판단한다면 바로 그 주체 당사자의 목소리는 주체로서 인정할 수 없는, 대상화된 타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어려운 문제다. 

 여기서 해결될 게 아니라 우선 영화를 보며 저마다 고민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오프닝

 첫 쇼트는 모래 알갱이 하나를 극대화하여 번쩍거리는 하나의 소우주처럼 보여준다. 다음 숏은 다수의 모래 알갱이를 보여주고 점점 그렇게 소우주에서 대우주로, 모래가 층층으로 결진 사막까지 시야가 확장되며 강렬한 몽타주를 완성한다.

 영화의 곳곳마다 사람의 피부, 모래, 벌레 등등 극도로 미시적인 세계를 클로즈업한 촬영이 두드러지지만 이 영화가 지향하는 시야는 점점 더 거시적인 세계로 확장된다. 비록 그 영화적 공간 대부분이 구덩이로 제한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소우주를 통해 그 밖의 대우주를 드러내려 함이고 결국 구덩이 밖에는 마을이, 마을 밖에는 더 넓은 세계가 존재한다. 더 넓은 세계는 그보다 넓은 세계에 비춰 구덩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구덩이를 탈출했음에도(또는 그냥 머물렀음에도) 누구는 여전히 구속된 존재라고 느낀다면(다른 누구는 구속되어 있지 않다고 느낀다면) 우리 저마다 주체적인 존재인지를 결정짓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답답한 철학적 질문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 질문을 답답한 일상에서 직면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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