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고 강렬한, 왠지 다시 보고싶은...
호러(Horror)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그 나름의 몰입감과 매력이 있죠. 개인적으로는 호러영화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독특한 카타르시스... 일상의 불안을 정화해주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전에 저는 잠이 안 올 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보다가 눈을 감고는 했답니다.(그리고 무슨 꿈을 꿨을까요?)
그렇다고 제가 호러매니아 정도는 아니라서 충분히 유명한 영화들 중에서 다채로운 성격의 공포와 매혹을 기준으로 나름의 리스트를 꼽아봤습니다.
13위
포제서(2020)
아들 크로넨버그의 장편데뷔작이기도 하고 가장 최근 영화라서 넣었습니다.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의 비주얼적인 개성 그리고 호러로서 조명하는 공포의 개성입니다. 이 영화의 공포는 ‘연기하는 배우’의 고통이고 또한 우리의 인격, 페르소나가 얼마나 쉽게 변질되거나 붕괴될 수 있는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위험합니다. 우리의 인격, 페르소나가 이미 ‘연기’로서의 성격을 지니기에 다른 누군가를 연기한다는 것은 원래의 ‘자아’를 위기로 몰아넣을지도 모릅니다.
12위
서던리치: 소멸의 땅(2018)
눈에 띄는 장점이 있고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완결성이라는 측면에서, 그게 부족했다기보다 오히려 거기 너무 얽매였달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전달하는 '호러'는 다른 호러물들과 근본적으로 차별되는 참신함이 있고 시각적으로도 훌륭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제목과는 반대로 실은 소멸하지 않는 우리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죠. 죽음은 관념에 불과하고 우리는 또 다른 생명에 녹아들어 영원토록 존재할 테니까요.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절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자연의 일부로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왜곡될 것입니다.
11위
텍사스전기톱 학살(1974)
공포의 스트레스로만 따진다면 상위권일 겁니다. 하지만 후대의 영화들이 너무 우려먹어서 그런지 현재 시점에서는 다소 관습화된 플롯이고 포스터만 봐도 대충 윤곽이 그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일드한 촬영과 끈질기게 쫓고 쫓기는 비명과 호흡, 히스테릭한 엔딩신은 기대 이상입니다. 정제되지 않은 공포와 혼란에 있어서는 여전히 지금 영화들을 압도한다고 생각합니다.
10위
쳐다보지 마라(1973)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당신인생의 이야기)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문어외계인이 호러를 찍었다면, 이 영화와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시간은 뒤엉켜 있고 그 혼란과 불안이 주인공과 공명합니다. 워낙 유명하고 컬트적인 숭배도 받지만 저는 무섭다기보다는 비극적이었습니다. 리스트에 올린 것은 도널드 서덜랜드와 줄리 크리스티의 어마어마한 베드신(문어외계인의 비선형적 시간관념으로 관찰하는?)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9위
킬 리스트(2011)
돈 벌어오라는 아내의 구박에 못 이겨서 전직군인은 친구와 청부살인 일을 시작합니다. 의뢰받은 리스트에 따라서 한 사람씩 죽여나가다 보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점점 자신의 응어리진 분노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이지만 매우 다크하고 음울하고 강렬한 호러를 원한다면 적합할 것 같네요. 생각보다 딥하고 좋은 영화입니다.
8위
에일리언(1979)
적어도 이 시리즈의 1편은 호러장르로서 너무나 뛰어나기에 꼭 포함시켜야 할 것 같았습니다. 영화를 본 분이시라면 반박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7위
악마의 씨(1968)
작고 가녀린 미아 패로우가 딛고 선 땅이 조금씩 좁아집니다. 이웃에 의해 사생활이 침범당하는 언짢음, 두려움, 점점 남편까지 의심하고 더 나아가서 나와 내 뱃속의 생명까지 무서워지는 절망. 영화가 상황과 감정을 다져가는 방식은 무척 섬세하고 다시 볼수록 그 장점들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여성의 시선으로 봤을 때 훨씬 잘 이입할 영화겠네요.
6위
사이코(1960)
아마 이 영화의 지하실이 없었다면 '기생충'의 지하실도 없었겠죠. 물론 그 역사성만으로 평가할 게 아니라, 지금 봐도 재밌고 다시 보아도 재밌습니다. 이 영화의 엔딩이 별로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 밖에도 멋진 장면들이 너무 많고 음악도 멋지고 다 좋아서 상관없어요. 당장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으니 안 보셨으면 일단 시도해보시길.
5위
더 위치(2015)
비교적 최근 영화지만 딱히 흠잡을 데가 없어서 가산점을 받았습니다. 영화 속 가족은 아버지가 독립적인 신앙관을 고집하면서 숲으로 내몰리고, 고립된 생존공동체이자 신앙공동체로서 살아갑니다. 그들이 직면하는 가난과 신앙의 동요가 초자연적인 공포와 조응하여 진짜로 무서운 상황이 펼쳐지죠. 같은 감독 로버트 에거스의 '라이트하우스'보다 저는 이 영화를 더 좋아한답니다.
4위
양들의 침묵(1991)
관객들은 '양들의 침묵'이 정확히 무얼 뜻하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한니발 렉터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는 조디 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왠지 그 두려움을 이해할 것만 같죠. 영화 내내 그녀가 보여주는 내적긴장과 불안, 그러면서도 용감해지려 발버둥치는 모습은 다른 무수한 호러퀸들을 압도해버립니다.
3위
큐어(1997)
살인하지 않는 살인마. 최면으로 애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인을 저지르게 한다는 설정은 좀 황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는 의사에게 최면을 걸며 여태 남자들에게 느껴왔던 분노를 떠올려보라고 말합니다. 처음으로 메스로 남자시체의 몸을 갈랐을 때 무엇을 느꼈는지... 그게 짜릿함이었음을 차분하게 자각시켜 줍니다. 우리들 모두가 조금씩은 그런 마음속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2위
샤이닝(1980)
나의 가족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 건 끔찍합니다. 그래서 더욱 많은 호러영화들이 '가족'을 공포의 보금자리로 삼아왔습니다. 샤이닝은 그들 중에서 여전히 범접하기 어려운 선배입니다. 이 영화의 오컬트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호하고 그래서 그런 모호함이 리얼한 공포로 다가오게 되는 이 영화만의 매력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너무 많이 봐버려서 오버룩 호텔이란 공간을 실제 가본 것만 같은 기분이네요. 한편으로 그만큼 영화 속 공간을 생생하게 체험하듯 감상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1위
퍼니게임(1997)
어쩔 수 없습니다.
가장 무서웠어요. 이 영화가 장르영화라고 우길 생각은 없고 매혹적이라고 다시 볼 만하다고 말할 생각도 없지만... 순수하게 가장 공포스러웠습니다. 왜냐면 다른 호러영화가 끔찍한 것을 목격하는 입장이라면 이 영화는 내가 당하는 것과 같아서. 그러므로 이 영화를 매혹적인 호러영화 1위에 꼽는 건 마치 나를 강간한 누구에게 박수라도 쳐주는 상황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니게임’은 결코 퍼니하게 즐길 수많은 없는 미디어 속의 폭력을 사유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 영화입니다. 두 번 다시는 아니라도 한 번쯤은 꼭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