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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해미의 세계

버닝, 이창동, 2018


 해미가 왜 종수에게 말 걸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반가웠을 수도 아니면 어릴 적 종수를 좋아했던 걸지도.

 그냥 누군가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뒷골목에서 종이컵 하나에 서로의 침과 담뱃재를 섞으며 대화 나눌 때 

 종수는 처음 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래봬도 나 글 쓴다는 식으로... 근데 그걸 해미가 천진하게 받아들이니

 종수의 태도도 누그러진다. 그가 건넨 싸구려경품 손목시계를 해미는 촌스럽다 웃으면서도 술집에서까지 계속 차고 있다. 

 그러니까 처음 만남부터 종수가 가진 자의식과 열등감 같은 게 해미에게는 좀 결여되어 있다.

 종수는 누가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음을 확인하면 비교적 순해지는 타입이라 술집에서 해미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해미도 종수가 자기 얘기를 들어준다는 걸 아는 것 같다. 그 얘기가 다소 터무니없어 보여도...


 이건 재능으로 하는 게 아니야뭐냐면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그게 다야.” 


 해미의 판토마임은 영화 전체에 중요한 메타포일 수 있지만

 해미에 대해서도,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그녀가 지키려는 자신만의 세계에 대해서도 드러낸다. 

 그녀가 그 판토마임에 익숙해져 정말로 자신에게 없는 걸 잊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녀는 돈도 없고, 나중에 밝혀지지만 친구도 없다. 가족도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없다는 걸 잊는다 해서 돈이 생기거나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없다는 것에 대한 박탈감, 열등감, 맞은편 앉은 종수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로부터는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중요한 건 그래서 밝아질 수 있다는 것. 돈이 없지만 없다는 걸 잊고 행복하게 아프리카로 떠날 수 있다. 근데 왜 꼭 거기로 떠나고 싶었을까? 오로지 허세와 허영이었다면 차라리 다른 곳이 재밌었을 것 같은데.


 당연히 해미도 리틀헝거다. 

 종수처럼.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사실 많이들 그렇지 않나? 낮에는 리틀헝거로 꾸역꾸역 살다가 이런 밤늦은 잠깐동안이나마 그레이트헝거인 척 해보는 것, 어쩜 그 정도 밸런스가 정상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면 해미는, 자신이 너어무나 리틀헝거라서 그레이트헝거를 꿈꿔야만 하는지도.

 종수는 그녀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고 있고 해미는, 멋있지 그레이트 헝거?라고 물으며 서글픈 표정이 된다. 

 영화배우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면, 현실에서 해미가 있었다면 그냥 좀 불쌍해보였거나 아니면 그냥 좀 이상해 보였거나 하지만 신기하게 종수는 그 이상하고 불쌍한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같다. 

 해미는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아이가 아니다. 종수와 함께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며, 자기가 왜 파주로 가야하는지 무슨 문제인지 궁금하지 않냐고 묻는 종수에게 해미는 “문제야 항상 있잖아...”


 해미의 작은 방. 늘 춥고 어두운 방. 운 좋으면 하루에 잠깐 남산전망대에 반사된 빛이 스며드는 방.

 실제로도 볕이 들지 않아 거울 같은 걸로 반사해서 벽에 비친 작고 흐릿한 빛을 촬영했다고 들었다. 

 그 방에서 해미가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 자폐증에 걸린 고양이 '보일'은 진짜였을까? 가짜였을까?

 진짜였다면 해미는 그 방에서 보일이랑 함께 놀았을 테고... 그녀의 침대 밑 콘돔이 남아있는 걸로 봐서 누군가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 사람이 해미의 '현실과 괴리된 세계'를 현실적으로 해석했다면 길게 가진 못했을 것이다.

 가짜였다면, 해미에게는 진짜였겠지. 완벽한 판토마임의 세팅을 해 놓고 보이지 않는 보일이랑 둘이서 함께 놀았겠지.


 "내가 고양이가 없다는 걸 잊으면 돼?" 


 해미가 아프리카로 떠난 동안 종수는 해미를 좀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나는 종수가 해미와 섹스할 때 해미의 머리맡 벽에 비친 작고 희미한 빛을 발견했기 때문일 거라 추측한다. 

 보이지 않는 ‘보일’이에게 밥도 꼬박꼬박 챙겨주고...

 암튼 종수는 '해미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까진 아닌데 그렇다고 막 연민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 사이의 어디쯤이지 않았을까. 

 적어도 무시하려 들지는 않았다. 지켜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해미가 벤과 함께 돌아왔을 때 종수에게는 해미와 함께했던 그 작은 세계가 균열한다.

 그리고 의심한다. 해미는 종수를 좋아했을까? 아니면 그냥 잠시 시간을 보낸 거였을까? 이 영화의 또 다른 미스터리. 

 곱창전골집에서 해미는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그레이트헝거가 되어 얼마나 고독했는지를 종수에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눈물 흘린다. 

 그리고 눈물 흘리지 않는다는 맞은편 사이코패스의 고백을 듣다가 까무룩 잠들어버린다. 

 잠에서 깬 후 주차된 두 대의 차 사이, 정확히 트럭과 포르쉐 사이에 해미는 서 있다. 

 먼저 종수가 자격지심을 발휘했고 그 자격지심은 현명했을 수도 멍청했을 수도 있다. 포르쉐 앞에 선 해미는 몇 번 종수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종수는 트럭에 올라탄다. 


 종수의 자격지심이 해미의 정체모를 마음과 엇갈리는 듯한 몇 군데 장면이 있다. 

 해미의 전화를 받고 카페에 나타난 종수는 벤과 나란히 앉아 그에게 손금을 보여주는 해미를 발견한다. 

 벤이 므훗한 목소리로 해미 마음에는 돌이 있다며, 그 돌 때문에 힘들어지고 맛있는 걸 먹어도 맛있지 않고...

 그리고 또 뭐라더라?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도 좋아한다 말 못하고, 

 그때 해미는 종수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

 카메라는 종수의 반응을 잡아준다. 종수는 그냥 구경하고 있다. 

 벤이 그 돌을 빼내야 한다고 말할 때, 오빠가 빼낼 수 있어요? 라고 목이 멘 음성으로 묻는 해미. 해미는 자주 그렇게 울먹임으로 말을 맺는다. 밝으면서 동시에 언제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감정에 놓여있다. 

 벤의 집으로 다함께 들어와서 아름다운 실내를 희번덕거리는 종수. 

 그 후경에는 해미가 종수를 살피고. 

 화장실이 어디 있냐고 묻는 종수에게 해미는 다시 벤에게 물어 저쪽이라고 가르쳐준다. 해미도 벤의 집이 처음인 것 같고 아마 어쩌면 벤과 둘이서만 그곳에 있기가 부담스럽거나 해서 종수를 부른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벤과 해미 둘 다 서로가 종수를 부르자고 했다고 말해버렸기 때문에 어느 쪽을 믿는가는 종수의 선택이었다. 


 "내가 살던 집이 없어져서 섭섭하네저어기 저기였는데... 흔적도 없어졌어그리고 우물도 없어졌더라우리 집 옆에 우물이 하나 있었잖아나 어릴 때 거기에 빠졌었는데... 너 기억나일곱 살땐가혼자 놀다가 거기에 빠져가지고... 우물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몇 시간동안 울고 있었어... 아무도 날 못보면 죽는구나 싶어서 너무 무서웠는데얘 얼굴이 딱 보이는거야그때 종수가 날 발견해서 구출됐지그런데 기억도 못하네.."


 메타포가 뭔지 모르는 해미는 매번 메타포로 뭔가를 표현하려 한다. 피곤한 스타일이다. 만약 이러고 노는 여자애가 진짜 있었다면...(언뜻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상대하기 피곤했을 거다. 

 도대체 누가 상대하려 들겠는가? 자기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데... 그런데 왜 자기만의 세계에 살아야 하는지는 아무도 별로 궁금해 하지 않지. 

 해미는 종수가 사는 파주집으로 벤의 포르쉐를 타고 나타난다. 

 그리고 우물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뭔가 시큰둥한 삐친듯한 얼굴로. 

 종수는 선뜻 해석할 수 없다. 나중에 해미가 사라진 뒤 종수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우물을 찾고 사람들에게도 우물에 대해서 질문한다. 

 우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그 우물을 통해 해미가 뭔가를 전달하려 했다면, 

 그건 아마 자신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을 때 그 때 종수가 나타나줬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헌데 종수는 그걸 모른 척 하고 있고... 그게 일곱 살 때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훨씬 최근에 일어났던 일인지도... 


 우물에 대해 한 명 더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긴 하다. 

 나중에 만나게 되는 종수의 엄마. 개인적으로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황당했는데, 왜냐면 존재감이 부실한 조연을 일부러 데려다놓은 듯 하고, 그마저도 너무 잠깐이며 또 그게 16년만에 만난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라곤...

16년 동안 사라졌다 16년 만에 돈500이 간절해서 나타난 엄마. 

 엄마는 종수에게 마른 우물이 하나 있었다고 빙긋 웃으며 말해준다. 그리고 카톡한다. 종수는 카톡하는 엄마에게 제가 해결해 드릴게요, 라고 말해준다. 그 마지막 하나 남은 불쌍한 송아지를 팔아서라도... 

 나는 종수가 해미를 잃어버린 후였기에 선선히 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꾸로 돌이켜보면 어릴 적 엄마를 잃어버린 종수라서 해미에게 좀 남달리 대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젠 그 존재감이 너무 사라져 투명하게 보일 것 같은 종수의 엄마는 해미와 조금 비슷한 면모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좀 과장해서라도 논의를 확장시켜 본다면, 종수가 아버지의 가난과 그가 풀지 못한 응어리를 물려받았듯이, 해미 또한 부모세대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다 똑같다는 얘기가 아니라... 해결되지 못한 채 자꾸만 불어나는 빚처럼 대물림되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미안함일 수 있다. 


 해미도 종수의 엄마처럼 사라져버리기 전에

 해미는 종수의 눈앞에서 노을을 마주하며 그레이트헝거의 춤을 보여준다. 

 자연광으로 촬영된 저녁 어스름 무렵은 그 저물어가는 시공간이 고스란히 담겨, 더 이상은 사라지지 않게 붙잡아두려는 간절한 리얼리티로 다가온다. 이 영화의 모호한 숙명으로 모든 것들이 허깨비로 전락한다 해도 이 순간의 실체만큼은 훼손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순간에도 그녀는 혼자 춤추고 있다는 것. 언제나 언제나 그랬듯이. 

 종수와 벤, 벤의 친구들 가운데서도 그녀는 사실 혼자 춤췄던 것이나 다름없다. 벤와 그의 친구들이 그리고 종수까지도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진짜 해미는 아무것도 몰랐을까? 그냥 바보였을까? 

 판토마임의 대가는 이딴 것쯤 극복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있고 자신에게는 없는 건 잊어버리면 된다. 더 집중하면 그들의 눈빛과 조소마저도 없는 걸로 치부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마저 없는 걸로. 완벽한 혼자인걸로. 완벽한 혼자가 됨으로서 그들 모두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전혀 모르지 않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현실이 나를 부정하면 나도 현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초라한 자의식, 열등감보다 훨씬 완벽한 복수로 애쓰고 노력하고 그럼에도 행복해지고 싶었던 게 해미의 방식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돌아오는 대가는 그녀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렇게 모든 걸 잊고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마저 완벽히 지워버리고 나면 그 세상의 끝,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와 사막 사이에서 그녀는 완벽한 그레이트 헝거, 혼자가 되어... 그 순간에 해미 곁에는 누가 있었을까? 아무도 없었겠지. 그래서 만약 누군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면...

 나는 그 누군가가 종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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