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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지옥의 묵시록> 안과 밖의 오버랩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1979


 오래된 영화들의 '역사적 가치'라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시민 케인>의 딥포커스가 당장 그 영화를 보는 내 감상에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물론 대단하다고 한 마디 보탤 수 있지만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는 내내 "와~ 반백년 전에 저 정도로 우주를 구현하다니 대단하지 않냐?"라며 계속 감탄만 한다면 곧 졸음만 쏟아질 뿐.

 결국 현재의 나는 현재의 눈높이로 바라볼 수밖에 없고

 역사가가 아닌 이상 역사적 가치만으로 마구 가산점을 때려 박기는 어렵다.


 그럼 왜 이제 와서 배트남 전쟁 영화를 볼까? 그 역시 반백년 전에 끝난 전쟁이고 이제와 대단한 비밀이나 관심거리는 아닐 텐데 말이다.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만 이 긴 영화를 두세 번 봤었다.

 볼 때마다 지루한 부분도 있었지만 순수하게 영화 안에서 아드레날린이 확 밀려드는 장면들 또한 있었다.

 예를 들면 미친 킬고어 중령이 이끄는 헬리콥터 부대가 '발키리의 비행'을 쩌렁쩌렁 울리며 아름다운 베트남 시골마을을 무차별 폭격할 때...

 솔직히 좀 즐거웠다.

 갑자기 내가 사이코패스였음을 고백하는 게 아니라 그 장면들만 따로 떼놓고 본다면

 카메라는 폭격을 가하는 헬리곱터 앞유리와 시선을 일치시키며

 이 높은 곳에서 버튼을 누를 때마다

 저 밑에서 치솟아 오르는 물보라, 터져나가는 다리와 가옥 등을 연쇄시켜 짜릿한 타격감마저 선사한다.

 흙더미와 함께 튀어올라 땅바닥에 처박힌 마을주민들은 냉정하게 프레임 포커스에서 비껴나 있으며

 마치 킬고어 중령이 디렉팅한 게임 속 NPC에 불과한 마냥 화면자체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 순간만큼 영화의 시선은 헬리곱터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바그너의 음악에 호흡을 맞추었고

 서핑하기 딱 좋은 해안이 붙어있다는 이유로 이 폭격을 감행한 킬고어 중령의 카리스마에 (어느 정도) 동조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 미친 전쟁에 휩쓸려 잠깐이나마 미친 파도에 올라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미친 전쟁을 미친 시선으로 담는 이 영화를 목격하는,

 시공간적으로 멀리멀리 떨어진 또 다른 시선, 관객들은 미치지 않았을 것이기에

 잠깐 동안 영화를 그저 영화처럼 즐겨버렸다 한들 곧 찜찜한 여운이 따를 것이며

 설령 프레임의 포커스에서 비껴나 있다 한들 그 나뒹구는 시신들에 관객 스스로의 포커스를 맞추게 된다.

 왜냐면 저들은 NPC가 아니었으니까.

 이 영화가 담으려 한 현실에서 저들 중 무수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화면 속 미친 시선에 화면 밖 미침을 목격하는 관객의 시선이 겹쳐지고

 이런 오버랩이 불러일으킬 복합적인 감정과 냉소적 효과를 염두에 둔 영화적 선택이 나는 용감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의 훨씬 많은 부분은 미친 킬고어 중령 같은 작자보다 이 미침을 목격하는 관객의 시선과 더욱 닿아있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덜 미쳤다 볼 수 있는 윌러드 대위가 관객과 교감할 수 있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비록 영화시작부터 호텔방에 처박혀 거의 부패되어가는 몰골에 온갖 지랄 생쑈를 보여주긴 한다만

 일단 호텔방을 벗어난 그는 놀랍도록 멀쩡한 군인인 체 하고... 영화 끝까지 가장 말짱하게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한다.(그의 영혼은 망가졌을지언정) 더 정확하게 말해 그는 어정쩡한 상태다. 전쟁터에 있으면 벗어나고 싶고 벗어나면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그 독백처럼. 완전히 미친 것은 아닌데 온전한 것도 아니다. 이도 아닌 저도 아닌,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할 수 없는 어정쩡한 경계인, 윌러드 대위는 그러므로 아싸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



 주인공 윌러드대위를 연기하는 마틴 신의 눈빛과 표정과 침묵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의 태도를 보여준다.

 비밀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구불구불한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은 보트 안에서조차 그는 구석진 배꼬리에 앉아있다.

 실전경험이 후달려뵈는 어설픈 부하 서너 명은 쉴새없이 지껄이고 지들끼리 치고받는데

 그 프레임 구석 또는 바깥에 머무르는 윌러드 대위는 그만의 프레임에 빠져 커츠대령에 대한 상상을 키워나간다.

 그들은 비밀작전의 비밀을 공유하지 못한다.

 커츠대령이란 비밀은 오직 윌러드 대위만이 밝혀내야 할 몫이며 언제부턴가 그 스스로에게 부여한 임무가 돼버렸다.

 점점 정글의 사타구니 깊숙이 들어갈수록 물리적 거리 뿐 아니라 커츠 대령에 대한 윌러드 대위의 내면적 거리 또한 좁혀진다.


 가끔 윌러드 대위는 이 미쳐 돌아가는 전쟁에 기꺼이 몸을 내맡긴다.

 킬고어 중령의 서핑보드를 훔쳐 달아났던 것은 그의 게임에 응해 놀아준 셈이다.

 허나 킬고어 중령의 광기에 영화가 잠시 어울려 줬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윌러드 대위는 곧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 회귀한다.

 헬기를 타고 날아온 쇼걸들이 위문공연을 펼치는 무대 앞에서 바글바글한 병사들은 흥분을 주체 못해 미쳐 날뛴다.

 윌러드 대위는 객석 구석에 찌그러져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이때 영화는 또 다시 윌러드의 시선(미침을 바라보는)이 아닌

 미쳐 날뛰는 병사들의 시선에 호응한다.

 눈부신 조명빛에 살을 드러낸 쇼걸들의 육체는 반짝이고 꿈틀거리며 율동한다. 구경하는 걸로 모자라 만지고 싶고 입 맞추고 싶은 병사들의 욕망을 카메라는 기꺼이 투영한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쇼걸들은 헬기를 타고 날아간다. 병사들은 무대로 난입하고 몇몇은 헬기에 매달린다. 헬기가 조명빛이 닿지 않는 밤하늘로 떠오를 때까지 그들은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말 그대로 좀비영화의 한 장면이다. 그리고 좀비영화가 아닌 이 영화는 다시 윌러드 대위의 시선으로 회귀하여 좀비떼 마냥 미쳐있는 전장의 풍경을 우울하게 응시한다.


 모두가 미쳐있을 때 우울해지지 않는 방법이란 함께 미치는 것이다.

 그럼 즐겁다. 즐겁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로부터 미친놈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윌러드 대위가 커츠대령에 대해 점점 알아갈수록

 그는 미친 게 아니야, 라고 그는 생각한다. 미친 게 아니라 여태 봐온 가장 뛰어난 군인이라고. 어쩌면 그는 모두가 미쳐버린 이 현실에서 유일하게 환각이 아닌 어떤 진실에 도달했을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누구이고 또 그는 누구일까. 그와 그는 서로 닮아있다. 그들은 둘 다 여기서 함께 미치기를 거부한(차라리 혼자 미친놈이 되려하는) 아웃사이더이다.


 앞서 킬고어중령 부대의 폭격이 NPC가 아닌 시신들의 잔상을 같은 프레임에 남겼다면

 쇼걸들의 위문공연은 욕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그녀들의 잔상을 다른 시퀀스에 남겨둔다.

 (다만 이 부분은 리덕스 버전에서 제대로 표현된다.)

 아열대의 폭우가 쏟아지는 진흙땅에 쇼걸들의 헬기가 주저앉아 있다. 윌러드 대위가 연료를 제공한 대가로

 그의 부하들은 한두 시간 쇼걸들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재회한 쇼걸(여전히 같은 무대의상을 걸친)

 그녀들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고 흙탕물과 화장이 번져 얼룩졌다. 무대를 벗어난 그녀들은 애처롭고 처량하고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

 부하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부하들은 만지고 싶었던 것을 만지고 입 맞추고 싶던 것에 입 맞춘다. '것'이 아닌 그녀 각자가 정신없이 뭔가를 떠들지만

 부하들 각자도 뭔가를 떠들어댄다. 남자와 여자는 떠든다. 서로가 듣지 않는 말들을. 그들은 뒤엉켜서 섹스한다.

 거의 노골적으로 약에 취한 히피남녀들처럼 묘사된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진정 이 영화가 그려내고 싶었던 게 전쟁터의 군인들이었는지 아니면 전쟁 바깥의 히피들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누구건 상관없이 그 현실을 살아간 젊은이들이 도망치고 싶어 미쳐가는 모습이었는지 조금씩 헷갈려진다.



 오버랩(overlap)은 이 영화를 얘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편집방식이다.

 영화 오프닝부터 도어즈의 The End 노래가 흐르며

 활활 불타오르는 녹색정글에 침대에 나자빠진 윌러드대위의 꿈꾸는 듯한 얼굴이 겹친다.

 이후에도 영화 끝날 때까지 오버랩은 빈번하게 활용되는데 때문에 영화 전체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띠며

 어렵지 않게 이런 추측에 도달하게 된다.

 혹시 윌러드 대위는 또 어딘가의 호텔방에 나자빠져 이 모든 여정을 꿈꾸듯 회상하는 것이 아닐까(그리고 그의 육성, 내레이션을 통해 우리는 그의 회상에 동참한다.)


 그럼 왜 돌이켜보는 것일까? 이미 그에게는 끝난 여정일텐데

 당연히 우리에게도 벌써 끝난 전쟁인데

 윌러드 대위는 왜 또 다시 이 기억을 소환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는 왜 또 그걸 쳐다보는 것일까?

 만약 그 기억이 확실하게 잠긴 가스밸브라면 굳이 또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직 어딘가에서 새고 있을 것 같은 불안한 기억,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여전히 불확실한 실체이기에.

 바로 이런 까닭에서

 글의 처음에서 말한 영화 안팎의 미친 시선과 미침을 바라보는 시선의 겹침

 글의 중간에서 말한 전쟁 안팎의 미친 군인들과 미친 히피들의 겹칩과 같은

 또 다른 의미의 오버랩들로 형성된 이 영화의 다층적인 레이어들이 비로소 유효해진다.

 몇 번이나 다시 그 시간을 복기해봐도

 미친 건 나였는지 그들이었는지 미친 곳은 전쟁터 안이었는지 전쟁터 밖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고 정의내릴 수 없는 혼돈.

 그 혼돈이야말로 그 시간을 규정한다. 우리가 계속 궁금해 하고 이해하려 발버둥치는 혼돈.


 결국 윌러드 대위는 답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오래된 영화를 접해 당혹스러워졌을지 모를 우리와 (조금은) 마찬가지로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허상인지 모든 가치와 질서가 붕괴해버린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광기와 또는 환각으로 당장 현실을 회피하고 보려는 자들과는 다르게

 진지하게 똑바로 혼돈을 응시하려는 자.

 사실 그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야말로 그와 커츠대령과의 교집합이다.

 그러므로 그는 꼭 그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 이 혼돈의 끝이 무엇인지 답을 얻어야 한다.


 그는 답을 구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거라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지레 짐작할 수 있다.

 왜냐면 우리가 속한 현실에서도 종종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시스템에 회의하고 깊은 혼돈을 품는 경우가 나타나지만

 거기에 진지하게 대응하려는 자는 보통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킬고어 중령처럼(물론 그보다는 덜 극단적으로) 농담처럼 놀이처럼 받아넘기는 쪽이 답을 얻지는 못할지언정 생존하기에는 훨씬 유리하다.

 어차피 누구도 답을 얻지는 못할 거라고 단정하기에 우리는 진지한 자를 비웃으며 우리끼리 히히덕거리기를 계속한다.


 나는 예전에 이 영화를 첨봤을 때

 윌러드 대위가 만나게 될 커츠대위의 모습이, 그가 이룩한 유토피아?의 모습이 꽤 궁금했다.

 막상 확인하고 나자 역시 실망스러워지고 말았는데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 최종목적지가 (지금 관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짙게 밴 신비화된 장소고

 또 짙은 그늘에 턱살을 감춘(다이어트에 실패한) 말론 브란도의 얼굴과 그가 내뱉는 관념적 대사들이

 여태 무수히 반복된 자기 파괴적인 빌런과 그닥 다를 바가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윌러드 대위도 나처럼 실망했을 거라고 그래서 이 전장의 다른 또라이들과 다를 바 없는 또 한 명의 또라이를 숙청한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의 말처럼 그는 커츠대령의 명령을 받아 커츠대령을 처형한 게 맞다. (어쨌거나)

 이 모호한 지점에서 관객 저마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기에 나도 해본다면

 커츠대위가 이 혼돈의 끝에서 발견한 진실이란 결국 죽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왕국에 시체들을 전시해놓았으며 죽음의 공포와 벗하기를 원했으며 그의 신민들은 마치 그를 죽음 자체의 공포를 대하듯 무릎 꿇었고 최후에는 그 스스로 죽음이 되어 공포 자체가 되었으리라 말할 수 있겠다. 이게... 받아들여지는가?

 말로는 그럴싸해보일지 몰라도 보통 우리처럼 평화롭게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뭔개소리? 싶을 수 있다.

 그러므로 윌러드 대위가 커츠대령을 처형하는 교차편집 신이 중요해진다.

 만약 윌러드 대위가 커츠대령을 처형하는 장면으로만 그쳤다면 그걸 아무리 잘 표현했다한들 연기라는 것을 알기에 시시해졌을 것이다.

 근데 그 장면에 배우나 CG가 아닌 진짜 검은 물소를 데려다놓고

 진짜로 목덜미를 칼로 내리쳐서 잘 익은 수박처럼 쩍 갈라져 분홍빛 생명에서 고깃덩어리로 급변하는

 가짜가 아닌 진짜의 죽음을 관객들로 하여금 목격시켰기에 그 순간의 공포감이 커츠대령의 죽음으로 전이하고

 종국에는 그의 유언이 뜻하는 바를, 그 진정한 공포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짐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말 진지하게 각 잡고 말해본다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나 당신이나 우리 각자 뭘 믿었고 뭘 옳다고 생각했고 무엇을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했든 혹은 사랑받았든

 상관없이

 최후의 순간에 우리 모두는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바로 그 검은 물소처럼

 죽음 그 자체의 공포에만 혼자서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혼돈에 가득 찬 삶을 통과한 모두의 엔딩이며 모두의 진실이며 모두의 해답이다.

 이 부분은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소설의 텍스트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문학이 가진 보편성을 끌어와서 이미지로 표현했고 그 지점이 영화가 당대의 현실을 넘어 보편성과 생명력을 발휘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도 생각한다. 물론 요즘에 이런 식으로 영화를 찍었다면 욕을 처먹었겠지만. 뭐 그 감독이야 대부에서 진짜 말대가리를 잘라 침대를 피범벅으로 만든 전례도 있고 하니...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중에는 급기야 드라큘라까지 찍고 말이다.


 간단하게 끄적거리려 한 건데 많이 길어졌다. 만약 이 엉뚱한 글을 다 읽어준 분이 있다면 정말 고맙겠고 최근 이 영화를 봤다는 글을 몇 번 봐서 혹시 그들의 감상에 흥미를 더해줄 수 있을까 수다를 떨어봤다. 내 주관적인 감상에 불과하다. 나중에 보면 생각이 바뀌어 있을지 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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