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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5. 2021

<폴터가이스트>

토브 후퍼, 1982


 <텍사스 전기톱 학살>의 토브 후퍼 연출이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냥 스필버그의 영화를 감상했다는 기분이다. 물론 스필버그가 제작을 하고 각본도 쓰긴 했지만... 검색해보니 토브 후퍼가 스필버그와 싸운 끝에 막판에 갈라서버렸고 그래서 스필버그 혼자 후반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각본 자체가 스필버그적 감성이 뚜렷한데 이걸 어떻게 다른 식으로 표현하려고 싸웠던 것인지 궁금하긴 하다. 아마도 토브 후퍼는 좀 더 날것처럼 또는 암울하게 그리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호러물의 무시무시함보다는 어떤 특수한 재난에 맞닥뜨린 가족의 정서가 훨씬 두드러지게 되었다.


 -오프닝

 정규방송이 끝나고 미국국가가 흐르는 옛날 컬러TV의 화면이 비춰진다. 치지직거리는 전파소음과 함께 푸르스름한 화면에 검은 얼룩들이 어른거린다. 카메라는 TV에서 물러나와 소파에 잠든 '아빠'와 그 옆에 앉아있는 골든리트리버 한 마리를 주시한다. 개도 TV를 시청했었던 걸까? 헥헥거리며 개는 계단을 뛰어올라가 '엄마'가 잠든 침실을 잠시 얼쩡거리고 다음으로 이 집의 큰 딸 다나가 잠든 침실을 찾아간다. 다나가 먹다남긴 과자봉지를 떨어뜨려 몇 개를 줏어먹는다. 이제 개는 여덟살 아들 로비와 다섯살 막내딸 캐롤앤이 잠든 침실을 찾아간다. 여기서 개의 바톤을 다섯살 캐롤앤이 이어받는다. 개가 떠난 후, 캐롤앤이 잠에서 깨어나 뭔가 홀린 것처럼 계단을 내려간다. 여전히 켜져 있지만 회색바탕에 검은 얼룩들만 일렁이는 TV화면 앞에 다가가서 주저앉는다. 그리고 TV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안녕" "크게 말해봐." "아니" "모르겠어." 아이는 점점 목소리를 키우고 다른 가족들이 모두 깨어나 캐롤앤이 TV와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바라본다.


 -가족의 일상, 가족이 속한 공간

 엄마와 아빠, 그들의 자녀 다나와 로비와 캐롤앤이 살고 있는 이층집은 영화에서 흔히 보는 미국중산층의 공간이다. 비슷한 집들이 모여있는 동네자체도 그러하다. 야트막한 산, 언덕들에 둘러싸인 분지에 형성된 이 중산층 동네는 태생이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다. 여기 사는 다른 이웃들은 어떨지 몰라도 주인공 가족은 아주 행복해 보이는데 그게 가식적이거나 피상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영화가 이 가족의 일상을 세세하게 정감있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다정하며 아들과 딸은 심각하게 비뚤어지지 않았다. 작은 딸 캐롤앤이 키우는 새가 갑자기 죽었지만 그 역시 평화로운 가족의 일상 중 하나일 뿐이라는 듯 표현된다. 엄마는 캐롤앤이 모르게 죽은 새를 변기에 버리려고 한다.(이 장면도 엄마가 속물적이라거나 부정적인 암시로 강조하지 않는다.) 캐롤앤이 이걸 알아채자 엄마는 할 수 없이 죽은 새를 장미꽃과 함께 담배상자에 담아 마당에 묻어주기로 한다. 캐롤앤은 흙 속의 담배상자 속의 죽은 새를 상상하며 기도한다. 이와 같이 다섯 살 아이가 목격하는 죽음에 대한 상상 그리고 또 아들 로비가 마당의 괴기스런 고목을 향해 품는 유아적 공포가 이 영화의 장르적 동기로 작용한다그러니까 비일상적 공포나 판타지를 보여줘야 할 장르영화는 서두에 주인공의 일상에서 논리적이지는 않아도 정서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해야 하는데 그걸 아이들의 동심으로부터 끌어낸다는 것이다. 관객은 먼저 이 행복한 가족에 이입하고 다음으로 가족의 일부가 되어 엄마, 아빠처럼 아이들의 상상력과 두려움을 공감하고 통제해줘야 할 입장에 위치하게 된다.


 -지상의 가족, 지하의 미국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중산층 동네, 주인공의 주택이 만들어진 땅 아래에는 관속의 시체들이 즐비하다. 부동산 개발업자가 비석만 대충 없애버리고 집들을 지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다섯 살 캐롤앤은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고 난 이후의 TV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그러고 보면 영화 초반부터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탐욕을 암시하거나 중산층 가족 자체를 의심스럽게 보는 식으로 장르적 모티브를 제공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영화는 그러지 않았고 그로인해 달라지는 영화의 결은 주인공 가족에 대한 낙관적인 시선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잃어버린 딸가족에 닥친 재난을 극복해나가는 것은 바로 이 가족에 대한 '낙관의 힘'이다딸을 잃고 믿을 수 없는 재난에 맞닥뜨린 엄마와 아빠는 믿을 수 없는 공포를 연기한다기보다 딸을 잃어버린 슬픔을 연기한다. 특히 아빠보다 엄마가... 그녀는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으며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았다.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버린 딸과 대화를 지속하고 가족으로서, 부모로서의 힘을 발휘한다. 최근의 호러장르 속 가족의 모습들과 비교하자면 가족이란 시작부터 위험해보이고 음험해보이고 의심스럽다. 그들은 끝내 비극으로 직결한다. 왜냐하면 현실의 우리가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낙관의 힘을.

 <폴터가이스트>에서 가족에 대한 믿음은 건재하며 과도한 탐욕으로 치닫는 미국 자본주의는 영화의 지하에 잠재되어 있다. 어느 날엔가 후자가 전자를 헤칠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그때는) 가족이 힘을 합쳐 지하의 공포들과 용감하게 맞서 싸운다. 


 -시대착오적?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무서운 장면보다 눈물겨운 장면이 두드러진다. 영화가 가족을 믿고 있으므로 영화 속 가족이 서로를 믿고 사랑한다는 게 나로서도 믿겨진다. 스필버그가 가족을 표현해내는 능력이다. 지금에 와선 그런 점이 좀 시니컬하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는데 나는 이 영화가 나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스필버그의 낙관론을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들은 당시에도 의심했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스필버그라도 지금 시점에서 이런 낙관론을 펼칠 수 있을지는 나 역시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난 후 여덟살 로비가 엄마에게 속삭인다. "만약 동생을 데려간 세상이란 게 따로 존재한다면 우리 가족도 나중에 밧줄로 묶어 모여있을 수 있을 텐데" 라고 말이다. 그들은 나중에... 먼 훗날에 모여 있을 수 있을까? 어둠 속 의자에 앉은 아빠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없이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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