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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6. 2021

물 자체의 간극 <도망친 여자>

홍상수, 2020


 2020년 12월 6일 날씨: 점점 추워진다. 


 <도망친 여자>는 한창 이런저런 변주를 반복하던 그의 영화들과 사뭇 다르다. 최근영화들과 비교해서도 덜어낼 수 있을 만큼 덜어낸, 최소한의 절제되고 단정한 형식만 취한 느낌이다. 영화는 주인공 감희(김민희)가 그녀가 아는 세 명의 여자와 차례차례 만나서 담소를 나누는 짧은 여정을 보여준다. 감희가 그녀 각각과 마주앉아 조곤조곤 대화하는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으로 러닝타임의 상당량이 채워진다.

 대화를 나누는 말투나 표정은 어색함을 연기하는 약간의 어색해 보이는 배우들 모습 예전 그대로이지만 대화내용은 꽤 보편적이다. 그러니까 지켜보는 관객이 끼어들고 싶어질 만큼 현 세태 여자들의 화두를 슬쩍 드러내 보이는 지점들이 있다.



 감희가 처음 찾아간 영순(서영희)의 집에서 두 여자는 마주앉아 고기를 구워먹는다. 감희가 맛있게 먹는 반면 영순은 좀체 고기를 건드리지 않는다. 영순은 자신이 원래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감희가 우물우물 고기를 씹으며 “그래요? 저도 그런데.”라고 맞장구쳐준다. 소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지에 대해 서로 맞장구치다 영순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 의식은 충분히 소랑 소통할 수 있는데... 우리 몸은 그런 걸 전혀 상관 안해. 그냥 지 본능대로 움직이는 거야.” 이 와중에도 열심히 고갤 끄덕여 주며 열심히 고기를 먹는 감희는, 김민희의 연기는 퍽 귀여워 보인다. 가식적이라기보다 그냥 단순하고 꾸밈없어 보인다.



 감희가 찾아간 두 번째 여자, 수영(송선미)의 집에서 두 여자는 남자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사실 감희가 만나는 세 여자와의 대화마다 남자라는 화두는 끼어있다. 으레 그녀들에게 남자는, 심지어 암탉을 괴롭히는 수탉마저 완곡하게나마 힐난의 대상이다. 수영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남자가 없다는 식으로 한탄한다. “괜찮은 사람은 드물어. 너어무 드물어. 게다가 한국 사람들은... 으-!”

 “좀 심하지.”라며 이번에도 감희는 맞장구쳐준다. 어쩌면 원래 의도했던 대사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한국 남자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런 한국 남자들 중에서 위층에 사는 건축가는 생각 깊고 점잖게 생긴 남자인 반면 자기가 한 번 자고 버린 시인은 스토커에 불과하다는 식의 수영의 남자얘기를 감희는 동의하고 수긍하며 들어준다. 힘내라며 격려까지 보탠다.



 감희가 극장에서 만난 세 번째 여자는 거꾸로 그녀를 발견하고 찾아온 우진(김새벽)이다. 마주앉아 서로 어색해하는 감희와 우진 사이에는 뭔가 과거가 있는 듯 보인다. 아마도 그 과거란 우진의 남편 정작가 때문인 것 같다. 우진은 감희에게 지난 일을 사과한다. 감희는 “그 사람 생각... 너희 둘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어.”라며 아주 많은 생각을 지나온 듯한 표정과 말투로 괜찮다고 말한다. 감희가 영화를 보고나온 후 두 사람은 한 번 더 우진의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눈다.(우진은 극장에서 일한다. 그녀의 남편 정작가는 극장지하에서 북콘서트를 여는 중이다.) 이제 우진은 감희에게 TV에 나온 정작가가 말이 너무 많다면서 진실해보이지 않는다며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감희는 미소 띤 얼굴로 들어준다.


 감희가 만난 세 여자가 저마다 얘기를 하는 내내 감희는 대체로 경청하고 수긍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그 세 여자가 털어놓는 얘기는 지금시대 특정계층의 여자들에게서 흔히 들어봄직한 고민이고 실망이고 냉소일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 감희는 그들보다는 좀 더 특수한 개인처럼 비춰진다. 그녀가 세 여자와 대화하는 여정에서 유일하게 똑같이 반복하는 자신의 얘기는 남편이 출장 중이고 남편과 결혼한 후 지난 5년 동안 하루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접한 세 여자는 각각 놀라워하고 의아해하고 한편으로 부럽다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나는 이 영화 <도망친 여자>가 ‘도망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예상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그런 인상은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녀들이 도망쳤다는 것은 아마 남자들로부터일 것이다. 감희와 영순이 나누는 대화에서는 실제 남편으로부터 도망쳤다는 영순의 이웃여자가 언급된다. 그 보이지 않는 이웃여자 뿐 아니라 화면에 나오는 세 여자들도 나름의 사정으로 남자와 (물리적인 또는 심적인) 거리를 벌려놓은 중인 것 같았다. 감희도 실은 마찬가지였을까? 감희 또한 내뱉은 말과 달리 남편으로부터 잠시 도망쳐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희가 한 말들이 거짓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감희는 단순하고 소탈하고 꾸밈없는 여자로서 카메라의 조금 더 특별한 시선을 받는다고 느꼈다.


 극장을 나오기 전 감희는 야외흡연공간에서 우진의 남편 정작가(권해효)와 조우한다. 우연이었을까? 감희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는다. 감희는 정작가에게 오랜만의 만남이 어색하다고 말한다. 정작가는 나는 편한데, 라며 빙긋 웃으면서 받아친다. 감희는 정작가에게 TV에 나온 모습을 봐왔다며 너무 말이 많다고 진실해 보이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 영화에서 처음 공격적인 말을 내뱉는다. 사실 그 말은 우진이 감희에게 했던 남편 뒷담화를 고스란히 따라한 것이다. 감희가 우진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는 불분명해도 그녀가 정작가에게 공격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싶었음은 분명하다. 감희는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나온다.


 감희는 극장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아까 그녀가 봤던 영화가 그대로 상영 중인 텅 빈 극장 안에 들어와 어둑한 좌석에 주저앉는다. 그녀는 잠시 현실로부터 피해 숨어있을 곳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앞서 영순과 헤어지기 전 그리고 수영과 헤어지기 전 감희가 창밖을 내다보는 서로 비슷한 장면들이 있다. 창밖의 흐린 하늘과 안개 낀 산자락을 감희가 혼자 바라보는 뒷모습. 카메라는 그녀 시선과 그녀의 말해지지 않은 감정을 따라 산자락을 응시하고 바로 그 산자락을 따라서 도시의 다음 장소 다음 여자와의 만남으로 영화는(감희는) 여정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감희가 극장 안으로 되돌아와 마주보는 스크린은 바로 그 창문들과 비슷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아까 그녀가 봤던 똑같은 영화임에도 화면 가득 펼쳐진 바다는 더 이상 흑백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색을 되찾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녀를 다음 장소와 다음 만남으로 이어줄 산자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늘과 바다를 반듯이 가르는 수평선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2021년 1월 3일 날씨: 춥다. 


 지난해에 썼던 글을 다시 읽어봤다. 다시 읽어봐도 특별한 관점이나 발견 같은 게 없잖아, 라고 느끼지만 그랬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이 영화는 뭐랄까 흔히 비평적으로? 해석하고 일반화하고 개념화하기가 까다로울 것 같다. 

 그러려고 하면 단서가 없는 건 아닌데 막상 그 단서를 붙잡아 의미를 확장하면 좀 과하다는 자의식이 생긴다. 

 인물들에 대해서도 이 감독의 잘된 영화들은(내 기준에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라는 고민이 자연스레 따라오는데 그런 점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게 된다. 그들에 대한 정보도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배제하려 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인터폰의 화면 같은 경우, 영순과 수영의 집에서 되풀이되기 때문에 부각된다. 그런데 이 부분을 건드리면 영화에 대한 영화, 메타픽션처럼 의미가 넓어지고, 그런 관점이 식상해진 감이 있고, 정말 그런 의도였다면 어차피 노골적인 장치였을 테니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걸 따라서 감독 개인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도 꺼려졌다. 

 감희에 대해서도... 그녀 말의 진실성을 더 의심해볼 법한데, 왜냐면 우진의 정작가에 대한 험담이 그녀에게도 해당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역시 영화에서 튀는 부분이고 뭔가 노골적인 신호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우 이런 걸로 판을 뒤집으려 했다면 것도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해서 꼭 거짓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어쩌면 당시 내 기분이 그냥 의심하기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인터폰의 화면에 대해서는 지금 생각해보니 꼭 영화에 대한 영화로 연결 짓지 않고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화면을 쳐다보던 감희를 떠올려보면, 그녀가 좀 막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게 꼭 위선이고 거짓이고 비밀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게 막막했을 수도 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조금씩 자기모순의 기미를 보이기도 하지만, 워낙 정보량이 제한되어 있기에 딱 잘라서 거짓말한다, 가식적이다 말하기도 뭣하다. 그들이 가식적인 인간이라서가 아니라나를 거짓으로 대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말없는 인터폰 화면을 쳐다보듯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불안해질 수도 있고. 숨고 싶어질 수도 있고.


 줏어들은 얘기 중, 철학에서 '물 자체'라는 게 있다더라. 

 나는 이 사과를 만질 수 있고 먹을 수도 있지만 이 사과라는 物 자체에 대해서는 닿을 수 없을 거라는...  

 황당하고 현학적인 얘기지만 이걸 사람사이의 관계로 가져오면 그럴듯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왜냐면 우린 같은 세계를 살아가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각자의 세계를 살아가는 거니까. 

 나는 당신과 대화하면서 당신을 알아간다 여기지만 실은 언제나 내 마음을 통해 당신 마음을 상상하며 헤아린다. 

 나는 당신과 섹스하며 당신을 강렬하게 느낀다고 여기지만 실은 언제나 나의 감각과 육체에 반응함으로서 우리가 이 쾌락을 함께할 것이라 짐작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물 자체와 같은' 근본적인 간극이 있고 때로는 그 간극 자체와 마주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짓이라 여기는가식이라 여기는 그 사람과 마주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물 자체의 간극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희가 남편에 대해 했던 얘기들도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과 아무 문제없는데 그냥 도망치듯 나온 것일 수 있다. 이후에 그녀가 만난 사람들도, 모두들 그렇게까지 서로 잘못한 건 없는데 결국 그녀는 도망치듯 극장 안으로 숨어들어 거대한 '물 자체의 간극'을 바라봤던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말장난이야말로 유치한 건데... 하지만 지난 해 썼던 글의 마지막 문단은 정말 이 영화와 교감한다고 느꼈던 감상을 담은 것이었다. 다시 읽어봐도 그 부분만큼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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