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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6. 2021

<현기증>의 밋지

알프레드 히치콕, 1958


 영화 <현기증>에서 가장 이상한...

 일종의 잔변감?이 남는 캐릭터는 주인공 스카티의 여사친 '밋지'다.


 영화 오프닝, 형사 스카티는 범인을 추격하다가 지붕에서 미끄러지고 그를 구하려던 경관이 추락사한다.

 영화의 다음 시퀀스는 시간이 경과해 스카티가 여사친 '밋지'의 아파트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두 사람 대화를 통해 스카티가 지난 사고 후 경찰을 관뒀을 뿐 아니라 심각한 트라우마(고소공포)를 겪고 있다는 게 밝혀진다. 그리고 이후의 사건을 끌고 오는 스카티의 동창 개빈까지 언급된다.

 이런 플롯상의 기능 말고도 흥미롭게 지켜볼 점은 대화의 당사자, 스카티와 밋지의 관계 그 자체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스카티와 밋지는 이성간이지만 서로를 오래 알아왔고 서로에게 쿨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처럼 보인다.

 그런데 두고 볼수록 서로에게 그저 편하기만 한 남사친, 여사친은 아니다.

 스카티는 밋지의 집을 수시로 들락대는 것 같고, 밋지는 무심한 척 애쓰며 스카티의 안부와 생활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스카티가 자신의 고소공포를 자조할 때 밋지는 그를 재롱부리는 아이처럼 바라보며 웃고 넌 이제 Boy가 아니라며 핀잔주기도 한다. 두 사람이 마주보며 수다 떠는 숏-리버스 숏은 한참 평화롭고 장난스런 무드로 오가다가 갑자기 두 군데에서 흠칫 그 리듬이 깨져버린다.

 첫 번째, 스카티가 자신을 Boy라고 칭한 밋지에게 가볍게 보복하듯 엄마처럼 굴지 말라고 핀잔줬을 때... 다음 컷에서 밋지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있다.

 두 번째, 역시 스카티가 그와 그녀의 前史(두 사람이 대학시절 약혼했다 파혼했다는...)를 대수롭지 않게 소환해

 니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네게 돌아갈 수 있어,라고 솔직히 진담은 아니라는 듯 툭 던지고 빠졌을 때

 다음 컷에서 밋지의 얼굴표정은 그냥 정색을 넘어섰다. 카메라는 그녀를 굽어보면서 그녀가 눈을 치켜뜨고 안경알 너머 스카티를 노려보는 시선을 섬뜩하게 강조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빌런이 누구인지 알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살벌한 표정의 샷이 배당된 쪽은 다름 아닌 밋지다.


 전직형사 스카티는 경관의 추락사 이후 정신적 외상이 거의 신체적 컴플렉스로까지 발전한 경우다. (Boy는 엄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접이식 사다리조차 올라가지 못한다.) 

 접이식 사다리에서 추락?하고 절망한 스카티에게 밋지가 달려와 그를 부축하고 안아준다.

 스카티는 밋지 앞에서 강한 남성일 수 없다. 

 사실상 약한 boy에 지나지 않으며 밋지는 스카티에게 엄마와 같은 염려, 관심, 추궁, 집착을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드러낸다.


 솔직히 나는 스카티가 예전에도 완벽한 독신주의자는 아니었을 거라 추측한다.

 그는 아마 틈틈이 밋지의 아파트를 들렸을 테고 밋지처럼 편안하게 소통하거나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문득 연락해온 대학동창 '개빈'은 알고 보면 '스카티'와 유사하기에 대조적일 수 있는 인물이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를 포함해서 얘기하자면

 '개빈'은 아내로부터 벗어나 아내의 재산까지 빼앗고 더는 구속되지 않고 종속되지 않는... 재정적 독립과 자유로운 삶을 얻기 위해 나약한 '스카티'를 이용하기로 결심한 남자다.

 그는 꼼꼼한 연출자마냥 그럴듯한 각본과 장소, 여배우의 캐스팅, 의상 메이크업까지 완비해놓았을 뿐더러

 이 모든 것들은 유일한 관객인 동시에 주연까지 맡을 '스카티'의 정신적인 허점까지 꿰뚫어 치밀하게 디렉팅 해놓은 상태다.

 스카티는 개빈의 연출의도대로 완벽한 관객처럼 속고 완벽하게 빙의된 남주처럼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데

 왜냐면 그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스카티는 매들린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사랑에 빠져버렸을 때(풍덩~) 간혹 자신이 상대에게 속고 있는지, 아니면 믿는 것인지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지는 순간이 있다. 


 스카티는 왜 어쩌다가 매들린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나의 관점에서 스카티는 이미 그녀를 만나기 이전부터, 그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보인다.  

 단지 그녀가 황홀하게 예뻐서만은 아니다. 밤마다 자신 때문에 경관이 추락死하는 악몽에 시달리는 스카티는

 개빈에게서 '매들린'이라는 그 여자가 유령에 홀려 한낮의 도시를 꿈속처럼 헤매 다닌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매들린이 결정적 위험에 빠졌을 때 스카티는 매들린을 구출한다. 스카티가 매들린의 목숨을 구한 것은 단지 타인의 목숨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죽은 자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특별한 타인을 구한 것이다.

 스카티가 매들린의 고통을 함께 극복해주려는 행위는 동시에 그 자신을 구원하려는 행위이고 그러므로 스카티에게 있어 매들린이란, 그의 여사친 '밋지'와 전혀 상반된 지점에 있는 여성인 것이다.

 스카티는 그와 그녀의 트라우마를 동시에 극복하고 다시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서 '매들린'을 지켜주는 '남자'가 되기를 열망한다. (엄마와 Boy가 아닌 여성과 남성으로서)

 그런데 만약 그가 또 다시 추락한다면... 사다리 밑에는 밋지가 기다리고 있겠지.

 결국 나약한 Boy일 수밖에 없는 스카티를 밋지는 예전처럼 보듬어주고 안아줄 것이다. 정녕 그녀가 그런 걸 원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영화 속 밋지는 스카티가 바라보는 밋지이기에,  그녀 입장에서 진정 원했던 관계는 스카티가 생각한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스카티는 또 그렇게 되길 거부하며 바로 그것이야말로, 스카티가 가장 두려워하는 공포스러운 중력이자 (자신이 열망했던)남성성의 추락이다. 


 예전부터 이 영화를 좋아해 서너 번은 본 것 같은데

 히치콕 본인의 자전적인 투영으로서 받아들이는 관점을 자주 접했다. 그런데 내가 히치콕도 아니고 나는 나의 시선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밖에 없기에... 그런 측면에서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나같이 평범한 삶으로도 충분히 공감하거나 사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다고 말하고 싶다.

 결혼까진 아니더라도 평범하게 연애하고 오래 사귀거나 헤어져 본 사람들에게라면 말이다.

 사실 내가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퍽 진지하게 품게 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매들린'과 '밋지'는 전혀 다른 여자일까? 그러니까 당연히 다른 인격으로서 따로 존재하지만 스카티가 바라보는 것처럼 전혀 상반된 지점에 서 있는 이성일까? 스카티에게 있어 매들린은 자신의 일부가 투영된 거울일 수 있고 밋지 역시 자신의 일부가 투영되거나 왜곡된 거울일 수 있다. 한쪽의 거울에서 직면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도망쳐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 보면 아름다웠던 그녀 역시 자신의 왜곡된 일부를 투영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섹슈얼한 관계에서는 어느 정도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일부 또는 판타지를 투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정도가 극심하면 그야말로 거울과 다름없어지고 거울과 거울 사이를 맴돌며 영원토록 헤맬지도 모른다. 아름다웠던 그녀,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고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외면하고팠던 내 모습이 거울처럼 비춰진다. 

 언젠가는 그런 악순환을 끊어내야만 할 것이다. 거울에서 벗어나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쉬운 게 아니다. 말했다시피 낭만적인 관계 또는 섹슈얼한 관계에서는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무엇, 내가 원하지 않는 무엇을 투영하게끔 되어 있다.(그렇다면 그 밖의 관계는 말처럼 그게 쉬운 일일까?) 그리고 전혀 그런 게 없다면 사람들은 그걸 낭만적이거나 섹슈얼하다고 부르지 않으려고 한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왠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쓰잘머리 없는 생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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