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lker, 잠입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79
“아가씨 세상은 절망적으로 따분해. 텔레파시도 유령도 비행접시도 없어. 절대 깨지지 않는 법칙만이 존재할 뿐...”
술에 취한건지 건들거리며 여자와 노닥거리는 작가 곁으로
스토커가 걸어온다.
스토커는 딱 한 마디로 여자를 쫓아버린 후 작가를 이끌고 허름한 술집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한참 전부터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와 교수는 초면부터 진리니 뭐니 서로 퉁명스런 대화를 나누는데(주로 작가가 떠들지만)
거기에 낀 스토커는 들리지도 않는 양 말수가 없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여기 아닌 어딘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스토커는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일까?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면
카메라는 반쯤 열린 문틈으로 기척 없이 잠입해 들어가 한 침대에 누운 스토커와 그의 딸과 그의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딸아이는 잠들어 있었지만 스토커는 눈을 뜨고 있었다. 사실은 침대 반대편 등 돌린 채 누운 그의 아내도 눈을 뜨고 있었다.
슬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온 스토커는 옷을 주워 입고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왔다. 아내가 그를 따라 나왔다.
아내는 그가 어디로 떠나려는 것인지 알고 있다. 아내는 울음을 터뜨린다. 스토커가 떠난 후 아내는 바닥에 쓰러져 누워 고통스럽게 울었다.
스토커는 벌써 자신이 내팽개치고 떠나온 아내와 딸아이를 생각하는 것일까?
작가의 말마따나 따분하기 그지없는 암갈색 세피아톤의 생활으로부터 저 혼자만 도망쳐왔다는 죄책감 따위를 품는 것일까?
스토커는 돈을 받고 작가와 교수를 금지된 '구역'으로 안내할 것이다.
20년 전 그곳에 운석이 떨어졌다느니 그래서 거기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느니... 그 ‘구역’의 어느 방으로 들어가면 진정으로 바라는 걸 이루게 된다느니 하는 위험하고 신비로운 소문만 무성한 장소다. 정부는 철조망을 치고 군인들로 하여금 그 '구역'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다소 위험천만한 모험을 함께한 후
스토커와 작가와 교수는 '구역' 안으로 들어섰다. 세계는 암갈색 세피아톤으로부터
푸른 하늘과 녹색의 울창한 숲이 펼쳐진 천연의 색깔을 되찾았다. 여기는 예외 없는 현실의 법칙에서 벗어난 신비와 미지의 (고로 위험한) 땅이다.
이처럼 극명한 영화의 변화와 가장 호응하는 쪽은 스토커일 것이다. 스토커는 축축하게 젖은 수풀에 얼굴을 부비면서 말 그대로 고향에 돌아온 듯, 안도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구역 깊숙이 작가와 교수를 안내하면서
스토커의 태도는 '구역' 자체에 대한 극단적인 경계와 조심스러움으로 바뀌었다. 구역 안으로 들어가고 구역과 교감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난 그는 이미 그것으로 인해 대가를 치러야했다. 딸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걸을 수 없었고 자신은 감옥에 갇혀야만 했고 스승도 잃어버렸다. 비교적 젊어 보이는 그의 얼굴과 달리 바투 깎은 머리 한쪽은 운석에 부딪힌 흔적인 양 하얗게 세어버렸다.
스토커는 구역을 두려워하고 신성시한다. 거의 인격화된 신처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만의 잣대로 세상을 보고 가늠하는 데 익숙해진 작가는 스토커의 충고를 새겨듣지 않으려 한다. (교수는 뭔가 알고 있는듯 그보다는 순종적이다.)
하지만 이내 작가도 이곳이 그 스스로 따분하다고 단정 지었던 현실을 초월한 장소라는 것을 깨닫는다.
너트와 매듭지은 밧줄 따위를 미리 던져보고
한참을 지켜본 후
한 턴에 한 번씩만 움직일 수 있는 턴제rpg마냥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다. 다음 턴의 걸음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 지름길도 안 되고 가능한 안전하게 에둘러 가야 한다. 구역은 살아있는 생명인 듯 스스로 길과 함정을 바꾼다. 그러나 구역이 스스로가 허락한다면 계속 걸어갈 수 있다.
스토커는 말한다.
구역은 가장 비참한 사람의 목숨만은 살려줘 왔노라고. 그러니 오직 믿어야만 한다고.
카메라는 긴 호흡과 느리고 섬세한 움직임으로 스토커와 작가와 교수, 세 사람이 침잠해가는 풍경... 물속에 잠겨 녹슬어가는 총기와 달력 따위들 사람과 시간의 흔적들을 바라본다. 가끔 그것이 '구역'의 시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졸지 않고 그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구역'의 존재감이 점차 부각되어 구역 안에서 함께 길을 헤매는 기분이 들기도 있다. 결국
관객도 길을 헤매야만 한다. 답답해하며 그래서 결국 말하려는 게 뭔데? 유명한 감독의 유명함을 의식(의심)하며 따질 수도 있겠으나
결국 이곳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길의 끝에 나타날 기적이 무엇인지, 쉽고 단순한 궁금증을 품고 걸어가는 쪽이 가장 쉽게 단순하게 영화에 참여하는 방법일 것 같다.
내 경우에는 구역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작가와 교수와 스토커에 대한 호기심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구역' 안의 그 곳... 그 방에서 이룰 수 있다는 소원이란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입 밖으로 꺼낸 말에 대한 응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역은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고 진실한 바람을 이룬다.
예를 들어서 스토커의 스승 '멧돼지'(별명이다.)는 친동생을 구역 내의 ‘푸줏간’이라는 위험한 장소에 밀어 넣어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
그 후에 그는 그 방을 찾아들어가 소원을 이루었다. 그는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가는 여기에 대해 멧돼지는 사실 그 방에서 동생을 살려달라고 빌었을 거라고 말한다. 헌데 '구역'은 그를 부자로 만들어버렸다고.
이게 뭘 뜻하는지 스스로 깨닫게 된 멧돼지는 자살한 거라고... 물론 이것은 작가의 작가다운 해석이다.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작가와 교수가 진정으로 무얼 바라는지도 선뜻 알 수 없다. 약간의 반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작가와 교수 나름 열심히 떠들어대지만 정말로 그걸 바라는지 그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점점 더 불안해진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으므로 그 방에 들어가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적어내려 가다보니 정말 동화나 우화처럼 느껴지는데
나는 딱히 이 영화를 우화적으로 그러니까 그 이면에 감추어진 관념이나 철학이나 교훈 같은 것으로 대체하고 싶지 않았다. 맞고 틀린지를 떠나서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영화의 끝으로 갈수록 스토커라는 인물에 대해 점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의 어떤 부분은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게 뭔지는 자세하게 밝히고 싶지 않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스토커에 대한 영화다. 나에게 있어서는.
스토커는 '구역'에 집착한다. 구역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뿐 아니라 구역은 그가 가진 소중한 무엇이다. 그는 사람들을 구역으로 이끌면서 설령 나쁜 일이 벌어지더라도 누구에게나 최후의 보루로서 희망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마저 없다면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동시에 스토커는 구역에 대한 한계를 스스로 미리 정해놓았다.
그는 절대 그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문턱까지만 사람들을 바래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왜?
만약 그 방에 들어가면 자신조차 몰랐던 마음 깊은 바람이 모든 것들을 바꿔 놓을까봐?
그럼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까봐?
자신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해진 아내와 애처로운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그렇다면 애초에 그가 간절히 바랐던 소원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애초에 집을 떠났을까? 그는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무사히 돌아오더라도 그의 생활은 다시 색깔을 잃어버리고 암갈색의 세피아톤으로 복귀할 것이다. 동화적인 엔딩이나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단 식의 헐리우드스런 각성은 현실에서 없을 것이다. 남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바로 그렇기에 그는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집과 구역을 그 어느 쪽도 포기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