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링클레이터, 2014
1. 오늘 친구랑 이 영화 얘기가 나와서 오랜만에 나는 이 영화가 왜 나에게 별로였던 것인지 한 번 생각해봤다.
2. 사실 오래전에 한 번밖에 보지 않았던 영화라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려울 듯하다. 그리고 당시 언론이나 평론가들이 워낙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쏟아내서 솔직히 조금 딴지를 걸고픈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 암튼 영화의 훌륭함이나 미숙함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그냥 나로선 애착을 가지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3. 결론부터 말해 나에게 이 영화의 결론은,
4. 그래서 주인공 '메이슨'은 이별에 쿨한 척 하는 찐따가 되어버렸다는 것.
5. 그러니까 12년에 걸쳐 배우들의 성장과 늚음을 담아낸다는 건, 멋지고 낭만적인 기획이고 비슷한 사례로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뜨완 드와넬 시리즈가 떠오르지만 그거랑은 또 다르다. 앙뜨완 드와넬 시리즈는 말 그대로 시리즈고, 각 시리즈마다 주인공의 특정시기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를 관객에게 준다. 반면 보이후드는 12년의 가족사를 꾸준히 찔끔찔끔 보여줄 수밖에 없는데. 기억하기로 매 시기마다 10분 남짓을 넘기지 않았던 것 같다.
6. 그러다보니 매 시기마다 어떤 씬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작가적인 의도가 강하게 개입될 수밖에 없다. 즉 관객들이 영화 속 인물과 함께 머무르며 그들에게 이입하고 체험하기 보다는 영화가 12년의 시간으로부터 추출한 특정장면들을 계속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계속 끊임없이 이별해야 하는 주인공 메이슨처럼 관객들도 계속 과거는 후딱후딱 떠나보내고 이사 다니는 기분이다.
7. 뿐만 아니라 인물과 상황을 입체적으로 다각적으로 바라보기도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엄마 페트리샤 아퀘트의 결혼은 왜 자꾸 실패하는가. 영화를 보면 그저 바보 같은 남자들을 만나니까 그런 것이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면 남자들의 바보같음과 더불어 메이슨과 사만다는 마음을 열지 않고 남자 쪽에서는 그들의 아빠나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스트레스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추측이 엉뚱할 수 있지만 예를 들어 그럴 수 있다는 거고 그만큼 그들의 삶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사유해 볼 여유를 특유의 영화적 형식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많은 걸 보여주는 만큼 충분히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8. 결국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애초에 의도했는지 안했는지를 떠나 이 영화의 기획에 따라서 가장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지점은 주인공 메이슨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야만 했었던 이별의 순간들. 벌써 부모이혼으로 한 번 이별한 상태에서 시작하고 그 후로도 계속 친구랑 이별하고 동네랑 이별하고 가끔 만나는 에단호크랑도 놀고나서 헤어지고 새아빠랑도 이별하고 새가족들과도 이별하고... 그러다보니 메이슨의 얼굴은 이별의 다크서클로 점점 썩어 들어가고 웬만한 이별에는 꿈쩍도 없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기방어가 심오한 성격으로 굳어간다.
9. 마지막에 엄마랑 이별할 때, 그게 바로 메이슨이 체득한 이별의 방식이라서 쿨하게 떠나버리고 나면 불쌍한 엄마는 어떡하나? 엄마 페트리샤 아퀘트는 홀로 남겨진 채 자신의 삶을 비관한다. 그토록 노력하고 그토록 애썼는데. 과연 우리의 주인공 메이슨은 무사히 자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스스로의 선택이 일으킨 나비효과를 정직하게 담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20세기와 21세기를 지나며 미국의 한 가족이 상처받고 무너져가는 과정.. 그리고 그 틈에서 성장한 소년이 어른이 되어서 과연 새로운 가족을 꾸밀 만한 용기와 믿음을 지니고 있을까라는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나에게 너무 비극적으로 느껴지고 그 비극이 삶의 단면을 말 그대로 단면적으로만 목격한 인상이라 아무래도 정붙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