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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Nov 06. 2022

색의 온도

잘 먹지 않아 철분이 부족해서였는지 눈꺼풀이 자주 떨렸다. 찬바람이 패딩 속으로 숭숭 들어왔지만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따뜻한 햇볕이 등을 감싸주었다. 볕이 좋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온이 차이가 나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새삼 당연한 이치라는 걸 깨닫고 웃었다. 지구의 모든 생명을 틔우고 살아갈 수 있도록 덥히는 것이 햇빛인 것을. 길에 서자 사방이 노란색이었다. 은행나무가 만드는 캐노피와 바닥에 쌓인 은행잎, 노란 안전운행 표지판, 가로등을 감싼 노란 지역구 표시와 노랗게 물든 담쟁이. 손을 대면 모두 따뜻할 것이다. 새들이 무리지어 날았고 하늘에 물결이 생겼다. 시린 눈을 가늘게 뜨자 속눈썹 가장자리에 무지갯빛이 드리웠다. 이 이상 무엇도 더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가로지르며 가끔씩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것들의 목록   

1. 볕이 잘 드는 돌담에 놓인 돌

2. 긴 통화를 할 때의 옛날 핸드폰

3. 갓 출력한 인쇄물 뭉치

4. 자발적으로 시작된 박수 소리

5. 한겨울에 헤매다가 찾아들어간 실내의 공기

6. 개의 입김

7. 뒷사람을 위해 남겨 둔 작은 안내문

8. 오랜만에 받은 편지를 뜯는 마음

9. 밥이 다 된 밥솥을 열면 퍼지는 김

10.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네모나게 밝아지는 벽지

11. 햇빛을 보고 서서 눈을 감고 있을 때 눈꺼풀 뒤로 드리우는 불덩이 같은 붉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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