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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Mar 26. 2023

솔라리스

Solaris


방 안에서는 오후 4시마다 비가 내렸다. 연극이 시작되는 신호처럼. 한때 문이었던 부분은 눅눅한 벽과 하나가 되어 이제는 실금 같은 윤곽만 남아 있었다. 빗방울은 골동품 러시아 찻잔 위로 넘쳐흐르고 테이블에 놓인 다과를 푹 적신다. 여름볕과 섞여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의 소리. 속눈썹 끝에서 비가 방울져 떨어진다. 이내 퍼붓기 시작한 빗줄기에 갈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언덕 너머에서 손짓을 한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개를 데리고 언덕을 뛰어내려 간다. (짖는 소리로 보아 개는 늙은 하운드 종일 것이다.) 

빗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천장에 달려 있던 확성기는 지직거림과 함께 이내 잦아든다. 빛나는 차양막 같던 여름볕도 사라지고 벽은 한결 차가운 잿빛으로 다시 자세를 고쳐 잡는다.

어두운 방은 다시 고요에 싸인다. 

방 안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작은 옷장 속에는 드레스와 숄, 오버코트, 모자가 가지런히 걸려 있다. 비를 머금어 두툼해진 양장본 여러 권과 박제된 비둘기 등의 잡동사니, 나이 든 학자들이 캠퍼스 나무 아래서 수그리고 모여 찍은 낡은 사진도 놓여 있다. 꿈속에서 내딛는 걸음은 으레 끈적한 반죽 속을 걷는 기분이다. 옷장 속 드레스에는 지퍼가 없고 액자 속 사람들의 옷에는 단추가 없다. 두꺼운 양장본의 물기 먹은 페이지들은 같은 문장을 반복한다. 꿈꾸는 자의 기억이 복원하지 못한 상세한 디테일까지 방이 구현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꿈꾸는 자가 가장 욕망하는 것,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갖고 싶은 것 - 예컨대 아름다운 크림색 롤스로이스 - 같은 것을 떠올린다고 해도, 엔진룸이 비어 있거나 도어의 잠금장치가 빠져 있거나 헤드라이트의 전구가 빠져 있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꿈을 꾸며 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그려낼 수 있는 상상력의 사람이라면 아마도 더 이상 롤스로이스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지퍼 없는 드레스를 입고 오래된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다. 드레스를 벗어야 할 때는 은가위로 소매를 자르고 옷장에서 새로운 드레스를 꺼내 입는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공구 테이블은 아버지의 공간이다. 아버지는 지독한 골초이며 400광년 떨어진 지구에서 목수로 일하고 있다. 다시 비가 올 것이다. 어제도, 그제도, 그 지난주에도 그랬듯이. 시간이 시작하던 날과 시간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의 포물선. 끝없이 광막한 우주, 또는 바다 한가운데 위아래로 떠가는 상자처럼 방 속의 속의 시간은 하루 속에 머무를 것이다. 


오후 4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솔라리스 (Solaris)는 1961년 구소련의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SF소설이며, 1972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영화화했다. 348쪽에서 스타니스와프 렘은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어두운 구석이나 미로, 막다른 골목, 깊은 우물, 그리고 굳게 닫힌 시커먼 문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세계, 다른 문명과 접촉하기 위해 머나먼 행성까지 진출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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