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와 휠라를 보며 느낀 점
휠라의 질주가 놀랍다. 한물 간 브랜드로 불렸던 세간의 평가가 무색할 만큼 압도적인 퍼포먼스다. 국내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대박이 나면서, 이제 중국인들의 한국 여행 필수 구매품 1순위에 '휠라' 제품이 단골로 등장한다고 한다. 당연히 실적, 주가 모두 대박이 났다. 2016년 1조에 못 미쳤던 매출은 올해 3조를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패션업계 전반의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휠라'의 화려한 부활은 놀라움을 넘어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휠라의 화려한 부활을 보면 구찌가 오버랩된다.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였지만, 구찌 역시 휠라처럼 한물 간 브랜드 취급을 받다가 극적으로 부활했다. 2016년 5조 남짓했던 매출이 2018년 10조를 넘었다. 매출로는 처음으로 샤넬을 넘어섰다. 매출뿐 아니다. 멋지다는 의미의 표현으로 It’s so GUCCI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구찌는 힙하다는 이미지 자체를 잠식해버린 브랜드가 됐다.
묘하게도, 구찌와 휠라가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한 시기는 2015년 전후로 비슷하다. 사실 두 브랜드의 부활에는 시기뿐 아니라 몇 가지 짚어 볼 만한 공통점들이 있어 보인다. 과연 망해가던 구찌와 휠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구찌와 휠라, 두 브랜드 모두 날개 없는 추락을 하고 있을 때 꺼내 든 회심의 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카드였다. 구찌는 외부 영입은 아니었지만, 무명에 가까웠던 미켈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했고, 휠라는 과감한 외부 영입을 통해 정구호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한다. 브랜드의 콘셉트와 방향을 총괄하는 자리에 무명의 인물을 발탁한 구찌나 외부 인물을 영입한 휠라 모두 일종의 모험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험을 걸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긴 했지만, 화려했던 과거의 기억과 자존심을 내려놓는 선택과 모험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바꾼다는 건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와 콘셉트를 새롭게 설정하고 브랜드의 방향성을 정한다는 뜻일 것이다. 결국 브랜드의 본질을 건드린다는 의미가 되는데, 사실, 과거가 화려할수록 본질을 건드리기는 쉽지 않다. 일종의 모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위기에 빠진 브랜드가 가장 흔하게 내놓는 해법은 최신 유행을 반영한 신제품 출시나 구조조정 등을 통한 경영 전략적인 해법이 대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구찌와 휠라의 파격적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카드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구찌와 휠라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바로 '뉴트로'다. 레트로에 새로움을 뜻하는 NEW를 합성한 신조어인데, 단순히 복고를 뜻하는 레트로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레트로가 과거에 유행했던 것을 그대로 옮겨내고, 그 향수를 즐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재현 중심의 단어라고 한다면, 뉴트로는 과거를 다루는 데 있어 재현보다는 재해석에 무게를 둔다. 복고를 새롭게 해석해서 즐기는 취향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에는 뉴트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힙트로, 빈트로 같은 용어도 등장하고 있다. 이런 용어들은 모두 과거를 끌고 오지만, 과거의 오리지널리티를 나름대로의 재해석을 통해 표현하고 즐긴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구찌의 미켈레나, 휠라의 정구호 모두 이와 비슷한 맥락의 발언을 한 바 있다.
핵심은 유연성과 확장성입니다. 유연성은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기본형에서 파생된 다양한 형태의 비주얼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에서 변치 말아야 할 부분을 유지하면서 시대적 요구를 적절히 반영하는 것이죠. 확장성은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다양한 각도로 활용하고 다른 문화 영역과 융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북저널리즘, <구찌피케이션, 유연성과 확장성의 리브랜딩>
저는 문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하다고 봐요. 첫째, 역사와 전통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사람. 둘째, 전통과 상관없이 새로운 창작을 하는 사람. 셋째, 저처럼 옛것을 요즘 시대에 맞게 재조명하는 사람.
휠라는 이미 그 뿌리가 뚜렷하기 때문에 새로운 감각으로 요즘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까에 포커스를 두고 작업했다 -조선일보<정구호 인터뷰 중>
구찌와 휠라는 역사가 역사이니 만큼, 아무래도 올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구찌와 휠라의 부활에는 이 올드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탈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구찌의 경우 2018년 매출의 62%가 35세 이하 소비자에서 나왔다. 휠라 역시 구찌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젊은 층의 구매 비율이 구찌보다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두 브랜드의 부활을 주도한 것은 기득권과 경제력을 가진 베이비붐, X세대가 아닌, 오히려 젊은 층에 해당하는 밀레니얼과 Z세대였다.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구찌와 휠라는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핵심 타깃을 밀레니얼 이하의 젊은 세대로 잡고 철저하게 타깃을 고려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로고리스(Logoless) 같은 당시 유행했던 미니멀리즘을 과감하게 탈피해서, 오히려 로고와 같은 아이코닉한 요소들을 과시하는 맥시멀리즘을 대담하게 보여주며 젊은 층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또한 기존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통해 개방적이면서도 한층 크리에이티브한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젊고 힙한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결국 젊음의 특권은 권력이 아닌 이미지다. 구찌와 휠라 모두 효과적으로 이 이미지를 활용해가며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찌와 휠라의 부활을 살펴보며, 오래된 브랜드의 화려한 귀환이 반가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밀레니얼 세대의 구찌와 휠라는 낯선 느낌이 있다. 적응이 안 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뭐랄까, 휠라를 보면 여전히 두산 베어스 유니폼이 떠오른다. 오랜 엘지 트윈스 팬으로서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정서에 세뇌가 되어버린 것일까? 음음... 어쨌든... 구찌 역시 개인적으로는 잘 적응이 안 된다. 음... 내가 알던 구찌는 뭐랄까, 세련된 여성보다는 우아한 여성의 느낌이랄까? 여하튼, 나는 세련된 것보다는 우아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샤넬백보다는 구찌백을 맨 뒷모습 쪽이 더 끌린다고 해야 하나... 음음...
그런데 이제 구찌는 힙하다. 아쉽긴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구찌와 휠라의 모습에 적응해야 할 시대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나저나, 제이에스티나에서 정구호를 영입했는데, 과연 제이에스티나도 휠라처럼 살아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