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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집중력을 "빼앗긴" 사람들

by 녹음노동자

나는 초등학교 때 모아둔 용돈으로 엄마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갔던 날을 기억한다. 마트를 서성이는 나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담긴 씨디를 보았다. 그저 정규앨범도 아니고 불법으로 구워낸 씨디 같은데 노래만큼은 나를 매료시켰다. 엄마의 생일 선물은 잊어버리고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더 옛날에는 LP라는 것도 있었지만 초등학교 때 90년대에는 CD가 꽤나 상용화가 되고 있었다. 씨디의 크기가 정해지는 데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인터넷 나무위키의 도움을 빌리면 "처음에 필립스는 LP의 저장 능력보다 약간 향상된 수준인 약 60분의 음악을 담을 수 있는 11.5cm 표준을 주장했으나 소니의 오가 노리오 부회장은 약 74분의 음악을 담을 수 있는 12cm 표준을 주장했다. 필립스의 11.5cm와 소니의 12cm 안이 한동안은 타협안을 찾지 못했지만 결국 오가 부회장이 주장한 12cm 안이 채택되었다. 오가 부회장이 12cm를 강력하게 밀어붙인 이유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베토벤 교향곡 9번 을 한 장의 CD에 담기 위해서였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9번의 가장 유명한 연주로는 빌헬룸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1951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74분)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음반(67분)이 꼽히는데, 필립스의 11.5cm 안에는 두 연주가 모두 수록될 수 없지만, 소니의 12cm 안을 표준으로 정할 경우 두 연주 모두 각각 한 장에 담을 수 있다. 초등학교를 지나 시대는 점점 더 빠르게 발전했는데 곧 중학생이 되어서는 아이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는 아이템으로 MP3라는 것이 유행을 했다. 당시에 사람들은 저작권에 대한 생각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다. 기기의 발전으로 베토벤의 노래 정도는 모든 연주를 담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이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콘텐츠는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왔다. 당시 또 ya dong 이 무분별하게 아이들에게 노출되기도 했다. 티브이에는 영화를 하루 종일 틀어주는 채널들이 생기고 얼마든지 원하는 영화가 있으면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볼 수가 있었다. 이 시점으로 VHS (video home system) 비디오를 빌려주는 시장이 급격하게 몰락하게 된다. 나 또한 사업을 정리하는 비디오 가게에 가서 보고 싶은 영화를 저렴하게 양손 가득히 집에 가져온 기억이 있다. 다만 그 당시에 너무 나이가 어려서 주인아저씨의 마음은 살피지 못했다. 얼마나 마음이 착잡한 일일까 싶다. 옛날에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다 알고 있는 상황일 때, 혹은 이미 예상 가능한 상황일 때 "안 봐도 비디오" 라는 말을 썼는데 지금은 "안 봐도 넷플릭스" 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세월이 참 야속하다. 나는 대학교를 1년 반 다니고 서둘러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 열심히 군생활을 하면서 위에 고참들을 하나, 둘 집으로 보내는 과정에 고참이 나가면 스마트폰을 살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스마트폰? 나는 대학교 때 초콜렛 폰을 썼는데 그게 참 편하고 좋았는데" 이건 세상 물정에서 멀어진 군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년 군생활을 마치고 세상은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곧 스마트폰이 휴대폰 시장을 점령하는 것은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세상의 모든 콘텐츠들이 휴대폰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각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다양한 전문지식들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을 제임스 카메론이 설명해 주기도 하고 국가대표를 몇 번이고 우승한 사람들이 운동을 알려준다.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LP, CD, MP3, VHS 비디오

하지만 모든 일들이란 양면성을 가진다. 건물이 높을수록 건물의 그림자는 길고 빛의 강할수록 어둠도 짙다. 좋은 약도 부작용이라는 것이 있고 사람도 단점으로 완성된다. 이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단점들이 있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집중력과 몰입의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게 되었다" 생각한다. 우리는 돈을 빼앗기게 되면 돈을 빼앗은 상대에게 매우 화가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중력과 시간을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그리 화가 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중력과 시간이 돈에 비해서 덜 중요한 것들인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군대를 전역하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써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거리를 걸어가는데 뭐든지 신나고 재미있었다. 스마트 폰에서 눈을 떼지 못해서 옆에서 오는 차와 충돌할 뻔한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 이제는 차에 탄 사람들도 전방주시를 제대로 하지 않는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이런 중독성과 위험을 알았더라면 나는 이것을 시작했을까 대답을 고민해 본다. 콘텐츠가 주는 장점과 단점 모두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휴대폰으로 다양한 형태의 영상들을 볼 수가 있었다. 좋아요. 조회수가 돈이 되는 세상 방송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자 더 자극적으로 더 선정적으로 시청자들의 본능을 자극했다. 유명세가 돈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먹거리 장사를 하는 기업들이 사람들의 입맛을 중독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설탕과 카페인을 들이붓는 일과 같다. "안돼"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달고, 자극적인 맛에 손이 끌리게 되어있는 일이다. 술로 몸을 망치게 되어서 술회사를 탓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그들이 잘못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음주가 마치 청춘을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는 권장하면서도 알콜중독으로 문제가 발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쉬쉬하기 바쁘다. 이것을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 사태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먹거리와 정신적인 중독에 관련해서 그 규제가 생기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스스로 가치를 지키는 방법을 익일 수 밖에는 없다.


많은 사람들의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루의 시작을 휴대폰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손에 휴대폰을 쥐고 틀기만 하면 내 정신은 휴대폰에서 제시해 주는 알고리즘을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그렇게 시작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 내 귀에는 이어폰이 연결되어 있었다. 어떠한 일에 집중을 하려고 노력을 하면서도 귀에는 여전히 소리가 틀려져 있다. 나는 얼마든지 이것들을 들으면서도 일에 집중을 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서 나 안 취했다고 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어느새 집중을 하려던 것에서 눈을 떼고 휴대폰을 또 보고 있다. 더 이상 내 머리와 마음에서 속삭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시끄럽고 자극적인 소리들에 동물적으로 반응한다. 이렇게 하루 종일 정신을 어지럽히는 자극적인 영상에 뇌가 절여져 있으니 정신이 바른 상태일리가 없다. 내 정신은 항상 피로감에 절여져 있고 점점 더 짧은 영상들에도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주의력이 낮아져 있다. 쇼츠라는 영상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은 몇 초마다 집중력을 옮겨 다니며 이런 일에 익숙해진다. 잠이 들려고 누울 때도 나는 영상에 끌려다니며 늦은 잠을 자는 경우도 잦았다. 하루에 많은 시간을 내가 원하지도 않는 영상에 의미 없이 흘려보내고 정작 집중해야 하는 곳에 몰입하는 시간은 한 줌에 불과하다. 단지 무엇을 열심히 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뿐이다. 나는 어렵지만 점점 이런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나 스스로 얼마나 영상플랫폼들을 지우고 깔고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이것은 편하게 내가 물리적으로 그런 종류의 영상들을 틀기 어렵게 만드는 노력이다. 이어폰을 실수로 잃어버렸을 때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애초에 다시 구매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또 이어폰을 구매하면 나 스스로를 잘 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영상의 소리가 멈추고 나니 세상의 다양한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휴대폰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시청하는 일이 지금은 어찌나 힘든 일인지 왜 이렇게 망가진 것인지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영상들을 보는 일을 경계하고 주의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는 것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타인들도 흔하게 겪는 증상일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주의력과 집중력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동안 사회는 얼마나 변화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많은 정보를 휴대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때문에 길을 걸으며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보면서 이동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영상에 목적성을 가지는 사람들은 잘 없을 것 같다. 그저 알고리즘을 따라 끌려다니며 정신적으로 지배를 당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영상매체의 뒤에는 사람들의 집중력을 뺏고자 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다. 나는 손에 휴대폰을 쥐는 순간 나 스스로 뇌의 기능을 잃어버리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손이 마치 신경으로 휴대폰이라는 새로운 뇌를 장착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과정보의 시대에 나는 왜 하루 종일 내가 원하지도 않는 정보들에 내 정신력과 집중력을 소모하는 바보 같은 일을 하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우리는 육체적 한계는 바로 인정을 하면서도 정신적인 한계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누구에게나 "권투로 타이슨을 이길 수 있습니까?" 물어보면 다들 "절대 못 이긴다"는 대답을 할 것이다. 하지만 정신력에 대해서 만큼은 우리의 한계를 잘 인정하지 못하고 무한히 주어지는 것처럼 착각한다. 우리의 뇌는 영상에 끌려다니고 계속해서 정신력을 소비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일에 집중해 볼까 할 때는 이미 맑은 정신과 집중력을 대부분 소진한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거나 그것도 하지 못해서 책을 펴 두고 손에는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건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나는 좋아하는 헬스를 하면서 휴대폰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참 많이 본다. 그럼에도 책을 피거나 운동을 하러 나오는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휴대폰을 하면서 운동기구를 차지하고 있다고 몸이 좋아지거나 공부를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는 샤워장까지도 휴대폰을 들고 들어와서 샤워를 한다. 멀티태스킹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몰입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설명하는 것뿐이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얼마든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 행위는 사고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떨어뜨리는 정신적인 오염에 지나지 않는다. 파묵의 말처럼 "정적이 시작되지 않으면 상상력은 작동하지 않는다" 인류에 그 오랜 역사에서 지금 시대의 인간만큼 하루 종일 빛이 나오는 네모난 화면에 노출된 인간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비정상적 상황에 대처를 바로 하지 못하는 과도기에 서 있다. 지금 시대에 중요한 것은 정보의 차단이다. 항상 순응하기는 쉽고 깨어있기는 어렵다. 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조용함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 그저 정신력을 소비시키는 영상에서 멀어지고 마음의 소리에 가까워져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인이 되기를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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