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엄마 친구를 이모라고 부르지 않는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이모 남편(이모부)이 돌연 돌아가셨다. 사고사였다. 내 가장 오래된 무속에 대한 기억은 이모부의 죽음과 연관돼 있다. 이모부는 갑작스럽게 계단에서 미끄러져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디까지나 추정이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모는 굿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죽은 자를 저승으로 잘 보내기 위해 하는 진오귀굿을 했을 것이다. 엄마는 어린 나를 굿판에 데려가지 않았고, 다녀와서는 내게 이야기해줬다. 무당에게 실린 죽은 이모부가 자신의 이름(나의 엄마)을 부르며, 왔냐고 웃더라고. 물론 그 당시 무당이 우리 엄마의 이름을 알 리는 없었다.
나는 무속을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했기 때문에 빨갛고 노란 옷을 입은 무당이 도무(跳舞)를 하는 것과 같은 단편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어서, 그 후 오래도록 내가 무속에 빠지리라 생각하지도 못했다. 민속학과에서 무속 수업을 들었다. 정확하게는 민속종교라는 이름으로 가정신앙과 마을신앙, 무속신앙을 배웠다. 학자에 따라서는 무속이 종교의 범주에서 봐야 하기에 무교(巫敎)라고 칭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속과 무교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니 무속이라고 통일하겠다.
처음에는 담당 교수님이 좋아서 수업이 재밌었다.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좋아하게 되는 게 더 위험한 일 아닌가. 상대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면 빠져나오기 힘들게 된다. ‘덕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사실 내가 교수님께 입덕해서 무속을 공부하는 것인지 신기한 무속에 끌려서 공부하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학원은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공부를 점점 하다 보면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부끄럽게도 민속도 잘 알지 못하고 무속도 잘 알지 못했다. 패기 넘치는 학부생 시절에는 내 나름대로 무속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교수님의 수업 때 안동탈춤페스티벌에서 축제를 관람하고 기말리포트를 어떤 주제로 쓸 것인지 발표해야 했는데, 알아듣지 못하고서 감상문만 짧게 준비를 해갔다. 다른 학우들의 발표 후 내 차례가 돌아왔고, 안동탈춤페스티벌에서 벌어지는 굿판은 상업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읽고 있는 여러분이 예상했듯이 나는 피드백 지옥에 갇혔다. 교수님은 안동탈춤페스티벌의 굿이 다른 굿판과 어떤 점에서 상업적인지, 다른 굿을 본 적은 있는지를 물어보셨다. 수업 때 영상으로 본 것들과 이번 축제에서 굿판을 봤다고 답변했다. 사람들이 공수받기 위해서 돈을 낸다는 점이 상업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굿에서도 공수받기 위해 굿판에 모인 사람들은 돈을 낸다. 내가 모르고 있던 부분이었다.
사실 당시 내 열등감은 굿판에 다니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옛날’의 굿판은 몇 날 며칠을 이어 나갔고, ‘현재’의 굿은 시대의 흐름으로 몇 시간 또는 하루 정도로 굿하는 시간이 줄었다. 어느 쪽도 갈 수 없는 나는 어떤 시간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가고 싶은데도 갈 수가 없다니. 연구하려면 굿판에 가서 현장을 경험해야 할 텐데.
기초수급생활자였던 나는 교내 근로 생활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는데, 학과 특성상 기말리포트로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마을이나 사람을 조사해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절대적으로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대학을 다니는 데는 돈이 들고,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데도 그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굿이 어디에서 열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내 자존심이자 열등감을 교수님께서 건드린 것이다.
“그럼 너는 실제 굿을 본 적이 없는 거지?” 그 한마디에 무너졌다. 수업 때 내 표정이 내내 안 좋은 것을 본 교수님은 다음에는 웃는 모습으로 수업 때 보자며 문자를 보내셨다. 자존심이 상해서 수업 중에 울음을 겨우 참아내다가 끝난 뒤 뛰쳐나가 엉엉 울었다. 내게 상처가 된 일이었지만, 이 교수님과 후에 잘 지냈고 결국에는 무속 공부에 더 몰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람을 키워주는 건 매서움보다는 다정함이라는 것을 다른 교수님을 통해 알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