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다른 삶의 무게, 그리고 그 고충. 둘째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
삼남매 이야기 -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서 자란 둘째의 고민 이야기, 그리고 언니와 동생의 조언.
나는 무리에서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이 생겨도 그저 단순히 ‘좋다’, ‘싫다’로만 생각을 했을 뿐, ‘내가 왜 이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라는 배경에 대해선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어도, ‘왜 이렇게 생각을 할까’에 대한 의구심 조차 가져보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런데, 하루는 내가 이것 저것에 대해 불평하는 걸 가만히 듣던 이수(둘째 태린이의 남편, 루이스의 애칭)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 나는 Ego가 너무 크고, 나만의 Boundary가 너무 넓다는거야. 그거야 내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쉽게 인정할 수 있었고 한번도 그것이 나의 단점이라 생각해본적이 없었어. 그런데 사실, 두개 다 공통적으로, 오히려 크면 클수록 넓으면 넓을수록 사람들이 조금만 가까이 와도 너무 쉽게 닿아버린다는거야.
내 자신을 남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Boundary가 너무 크면, 오히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 한 마디와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내 하루의 기분이 좌지우지 될만큼 스스로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는 것을 몰랐던거지.
예전에 언니에게 처음으로 시댁 식구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을 때에도, 이수에게 서운한 일에 대해 말할 때에도 둘의 답변이 비슷했어. ‘별 의미도 담기지 않은 말 한마디/의미없는 행동 하나에 왜 이렇게 기분 나빠하냐’고. 그땐, 그저 ‘왜 내가 서운해 하는 것들은 둘에게 아무렇지 않은 일인걸까’ 하면서 오히려 내 기분을 알아주지 못하는 둘의 모습에 더 속상했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큰 Boundary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말과 행동들을 스스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
올해 초, ‘Surrounded by Idiots’ 라는 책을 읽었어.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총 4가지 유형의 사람들에 대해 말을 하는데, 읽다보면 그저 성격 유형에 대해 단순하게 나열해 말하는 듯 하지만, 책 초반 작가의 말과 후반의 결론에 나오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이거더라고.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갈등을 없앨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나에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나 이제부터 너 싫어'의 단순한 결론도출이 아닌, ‘나는 상처를 받을 수 있는 말이지만, 너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구나. 이해해, 이제 나도 괜히 상처 받지 않을게’ 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게 중요하다고 해.
‘틀림이 아닌 다름이다'는 말은 살면서 흔히 들었던 말 중 하나라, 세상 누구나 ‘너와 나는 다르다'곤 너무나도 쉽게 생각 하지만, 사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인생 과제라고 생각해. 특히나, 요즘같이 ‘알고리즘'에 의해 선택받은 온갖 컨텐츠와 광고들이 내가 좋아하는 것, 관심있는 것, 알고싶은 것들에 의해서만 맞춰지는 세상 속에선 말이야.
그래서 이젠, 책을 읽을 때에도 어떤 한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책 두권을 읽어. 물론 어떤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때 하다못해 정치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그리고 작년부터 뜬금없이 독서모임을 시작한 이유도 같은 이유 선상에 놓여지는 것이, 나는 둘과 달리 학창시절 친구가 많이 없었잖아? 나와 다른 다양한 견해와 모습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에 대해 자주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야 했는데, 그런 경험을 자주 하지 못했다보니 내 스스로 Boundary를 키워가면서 나만의 세상, 내 의견, 내 견해가 중심이 되어,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면 ‘이해'보다 ‘나와 다르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던 것 같아.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내가 앞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잊지말아야 할 숙제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나와는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갈 둘에게도 한번쯤은 머릿 속에 새겨보라 권하고 싶어.
그러게. 사실 삶은 끊임없이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발전해 나가고 깨닫는 과정의 연속인 것 같아. 인류역사학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끊임없이 척박한 환경에 맞서 싸우기 위해 집단 생활 및 단체 행동을 하는 방식을 택했고 그 결과,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로 진화했지. 이번 코로나 때 전 인류가 깨달은 점이 있다면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였던 것 같아. 지역감염이 자꾸만 발생되는 이유도 결국은 사람간의 관계를 통해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 도시를 락다운하고 재택근무를 실시하면서 사회적 거리를 두니 우울증 환자가 급증했다잖아?
오프라인으로 만날 수 없으니 온라인이나 버추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니즈가 자연스럽게 커지고, 클럽하우스 같은 SNS가 떠오르고 블로그 역시 작년 한해 동안 역대 최대치인 3억건에 가까운 글 생산량을 기록함과 동시에 공감과 댓글 수는 1억 5천만개에 달하는 등 SNS가 어느때보다 활발했던 것 같아. 결국 사람은 사회적인 관계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지.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인간은 이제까지 맺어온 관계의 총합이다. ('사람은 결국 이제까지 만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segment에 의해 결정된다.' 같은 말인데 정확한 워딩 찾으면 replace예정)
그 관계의 본질 속에는 결국 사람과 사람간의 이해가 필수불가결적인 요소인 것 같아. 네가 말한대로 사람은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배우려는 노력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한다고 생각하거든. 이제까지의 나 역시도 이 부분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다니면서 해외에서만 인생의 3분의 1을 살다보니 밀도높은 소수의 관계를 갖는다기보다 지엽적으로, 피상적으로 ‘알고 지내는’ 관계에 익숙했던 것 같아. 정 주고 마음을 터놓는다 하더라도 내가 언제 이 땅을 떠날 지 모르기에 언젠가는 곧 떠날 사람처럼 의자 끝에 엉덩이만 겨우 걸친채로 살아왔었지. 그러다보니 진짜 마음 터놓고 지내는 사람의 수가 정말 손에 꼽더라고.
어쩌면 그래서 내가 최근 N년 들어서 오래된 연애를 하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어떻게 보면 상대방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딱 이정도’라는 생각이 와닿으면 더 이상 그 사람을 알고 싶지 않더라고. 지엽적으로, 피상적으로 누군가를 ‘아는 척’하는 건 되게 쉽지만 실질적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되고 싶은 지에 대해서 딥한 관계를 맺지 않고 싶었다랄까. 우선적으로 내 자신에 대한 정의조차 잘 내리지 못했는데 내 주변에 있는 누군가로 인해 내가 영향을 받고 또 휘둘리게 될까봐 조심 스러웠던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둘러보니 모든 사람들은 내 스승이 될 수 있더라.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나와는 전혀 다른 세대를 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도, 접점이 없을 것만 같은 쌩판 모르는 남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서건 배울점이 최소 한 두개는 있다는 생각을 했어. 사람은 여러가지의 면이 존재하고, 개개인이 삶을 살아오면서 가지게 된 캐릭터나 배경, 그 인생의 스토리는 저마다 달라서 그 각각을 통해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점이 분명히 있더라고. 전 세계 70억 명의 인구가 있는데, 그만큼 세상엔 70억개의 스토리가 존재하는 셈이지. 아무리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남들이 봤을 때 정말 별로인 삶을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면교사를 삼거나 저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고 말이야.
인류는 이렇게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고 또 더 나은 방향으로 서로를 이끌어주면서 러한 다양성을 통해 발전해 왔다고 생각해. 누구나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인간사회에서는 서로가 다른 부분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공감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 이해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Understand’를 살펴 보면 ‘under’과 ‘stand’로 나뉠 수 있는데 이 말인 즉슨, 상대방의 ‘under’ 즉 아래에서 ‘stand’ 서보는 것. 내가 이 사람이라면 어떨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너도 결혼 생활을 해봐서 알겠지만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건 수많은 이해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니. 30년 넘게 함께 한 우리 엄마아빠도 아직까지 투닥투닥 다투기도 하시고 토라지기도 하시는데 우리라도 뭐 별반 다르겠어? 결국 상대방은 어쩔 수 없이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반대편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려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아.
사람이 좋고 싫은데 이유가 굳이 필요할까? 같이 있으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배꼽 잡을 정도로 웃기지 않아도 마냥 편하고 좋은 친구가 있고, 아무리 재밌고 재치있어도 마냥 불편한 친구가 있잖아.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어도 눈길이 가는 이성이 있고,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이어도 마음이 안가는 이성도 있고. 그런걸 생각하면 인간관계라는게 1+1=2처럼, 근의 공식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게 아닌 것 같아.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거지.
과거의 작은누나는 작은누나 말대로 상대방을 판단하기에 급했던 것 같아. 무엇 하나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으면 싫다. 이래서 싫다 저래서 싫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단점도 있고, 실수도 할 수 있는데 용납하지를 않는거지. 그래서 학창시절에 친구가 많지 않았던 것 아닐까?
상대방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 정말 좋은 것 같아. 상대방도 상황이라는게 있고,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이유와 배경이 있을텐데 그걸 이해하면 상대방의 행동에, 상대방의 실수에 좀 더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상대방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배려도 하고, 친절도 베풀고 정말 좋을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느끼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작은누나가 인간관계를 너무 이성적으로 대한다는거야.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물론 중요하지. 중요하지만 인간관계는 이해만큼이나 감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좋은 사람을 두고 왜 이사람이 좋은가 이해를 하려고 하면 그 과정중에 오히려 상대가 싫어질 수 있고, 싫은 사람을 두고 왜 이사람이 싫은가 이해를 하려고 하면 인간관계가 너무 피곤해질 수 있지 않을까? 좋으면 좋은대로, 싫으면 싫은대로 놔두고, 상대방이 더 궁금해지면 그 때 알아보면 되지 않을까 싶어.
나는 인간관계에서의 태도가 작은누나랑 많이 다른 것 같아. 나는 노자의 도가사상처럼 '무위자연'의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 같아. 그저 좋으면 좋은대로, 싫으면 싫어하는대로 흐르는 물에 내 몸을 맡기듯 감정에 솔직해지는거지. 그러다보면 좋은 사람에게는 더 도움을 주게 되고, 더 응원하게 되며 더욱 가까워지고, 싫은 사람에게는 애써 연락하지도 않으며, 좋아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는거지. 그렇게하면 내 주위에는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만 자연스럽게 남아있더라고.
내 태도가 정답도 아니고 누나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지만 그저 물 흐르듯 감정에 충실한 인간관계도 필요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너무 이성적으로 다가가거나, 이해를 하려고 굳이 감정 낭비하지 말고 애써 당길 필요도 없고, 밀쳐낼 필요도 없어 스트레스가 없는 자연스러운 인간관계, 추천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