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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기 Feb 19. 2023

우리는 다르지 않아 - 연극 <태양> 리뷰

국립정동극장, 경기아트센터, 경기도극단이 공동기획 및 제작한 연극 <태양>(김정 연출)을 관람했다. <태양>은 마에카와 토모히로가 집필한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이번 프로덕션으로 재연을 올리는 연극이다. 

<태양>은 근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SF 장르의 연극이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전파로 인해 인류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인간 집단이 두 분류로 나뉘었다는 설정이다. 젊고 건강한 외형을 갖고 살지만 태양을 마주하지 못하는 신인류 ‘녹스’와, 녹스의 등장으로 도태된 옛 인류 ‘큐리오’를 이분법적으로 나눈 세계가 펼쳐진다. 


극 중에서 하늘에 뜬 태양은 언제나 모두를 공평히 비추는데, 역설적이게도 땅에 붙어서 살아가는 인류는 둘로 나뉘어 절대 만나지 못할 것처럼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처럼 명확한 설정과 세계관으로 만들어낸 서사 구조와 더불어, 세밀한 움직임과 연기가 조화를 이루어서 희곡의 글맛이 재미있게 살아난다. 연출이 배우들의 역량을 최대로 이용하려 애쓴 노력이 돋보였다. 덕분에 장면의 아이러니가 더욱 두드러졌고, 일본 희곡 특유의 건조하고 냉소적인 톤이 더 생동감 있게 변했다. 


덕분에 SF나 판타지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초반부가 잘 짜인 무용, 조명, 음향 효과와 함께 표현되어 꽤 이해하기 쉽게끔 구성되었고, 관객이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 


무대 위에서 녹스와 큐리오의 공간을 나누어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선 하나다. 거기에 단출한 조명을 추가해 무대 공간을 더 명확히 분리하고, 배우들의 연기로 같은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사는 인류 집단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선 하나를 넘나들며 배척하고, 경계하며, 심지어는 차별과 혐오를 일삼는 인간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당장에 대한민국은 분단국가고, 우리는 거대한 선 하나로 나누어진 땅에 발을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 


너도 나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고작 실금 하나를 넘나들며 왜곡된다. 이곳과 저곳을 나누고, 타자화를 일삼는 행동이 무대에서는 더욱 압축되고 과장되어 그려진다. 마냥 풍자와 해학으로만 바라보기에는 씁쓸한 광경이다. 


녹스는 영원불멸한 신체를 가져 기존 인류의 신체 능력을 초월한 이들이다. 불필요한 일을 벌이지 않고, 규격화되어 있다. 생존 경쟁에서 승리하여 우위를 점한 이들이니만큼, 이성과 실리를 따지며 조직의 규율을 따르는 개인으로서 살아간다.  



특히 어린 시절에 큐리오로 살았다가 녹스로 개조된 이들에게는 인간의 연약함과 삶의 부질없음이 더욱 두려웠을 테다. 그러니 극 중에서 젊은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녹스가, 자신과 살아온 나이는 비슷한데 외형은 늙수그레한 큐리오를 보고 ‘늙었다’가 아닌 ‘낡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이해가 된다.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녹스들의 사상은 나약한 큐리오를 밟고 올라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반면에, 어떤 큐리오는 강한 생명력과 힘을 가진 녹스 집단을 척결하고 지워버려야 할 쓰레기로 매도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들의 극단적인 인간상이 상징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특히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 권위주의, 경쟁주의의 폐단을 고루 품고 있는 곳이다. 자신과 타인을 끝없이 고립시키는 사회에서는 진정한 화합과 행복을 얻기가 어렵다.
 

진정한 만남은 타인과 나 사이에 있는 벽을 무너뜨림으로부터 시작된다. 녹스인 후지타와 큐리오인 데츠히코는 처음에는 서로를 무서워했지만, 각자 동경하는 상대의 무언가를 공유하면서부터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후지타는 태양을 보지 못해 밤에만 활동할 수 있다.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녹스다. 밤낮이 바뀌어 자연은커녕 실외로도 나갈 기회가 거의 없는 현대 사회인의 일상과 비슷하다. 그래서 후지타는 자연을 선망한다. 하룻밤 새에 순환하는 햇볕의 따스함을, 직접 키워 먹을 수 있는 홍차의 향긋함을 품에 안고 싶어 한다. 


데츠히코는 지리멸렬한 빈곤함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무르고 순수한 인간이다. 흉하게 늙어가는 지저분한 어른들의 모습에 경멸을 느끼고 자신은 언젠가 녹스로 변하길 원한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해 글자도 읽지 못한다. 그러니 높은 지적 수준을 갖추고 자신과 다르게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 녹스를 존경한다. 그러나 후지타는 데츠히코에게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라며, 데츠히코에게 지혜로움이 있다며 그가 몰랐던 사실을 일깨우도록 돕는다. 


일깨워주는 것. 잘 몰랐던 ‘나’와 ‘너’의 모습을 마주하게끔 돕는 것. 후지타와 데츠히코가 갇혀 있던 알을 깨뜨려서 둘의 세상을 하나로 합칠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이다. 


나도 큐리오와 녹스 양측의 면모를 둘 다 가진 사람인지라, 어떨 때는 너무나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타인을 짓밟을 때가 있었고, 때로는 감정에 치우쳐 내 멋대로 행동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 문제들의 시발점은 사건의 중심을 ‘나’에게 두고 생각했던 마음이었다. 내가 우선되면 타인과의 관계는 반목과 갈등으로 이어진다. 결국,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등을 돌리고 헤어지기 일쑤다.  



나도 너와 다르지 않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그러니 너도 나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인간일지라도, 같은 태양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 진정한 만남은 그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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