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삶과 죽음, 정상과 非정상 그 경계에 대하여

by 나님


끝과 끝은 통한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이리라.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보여주는 삶과 죽음, 정상과 非정상이 그러하다. 죽고자 했던 베로니카는 죽음이 임박해서야 살아가고자 했고 현실에서 도망쳐 자신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뒀던 에뒤아르는 격리가 주는 안정감을 걷어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비슷한 주제지만 다른 궤적을 보인다.


내 마음이 편치 못해 고른 책이었다.

물리적으로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제는 사는 대로 살고 싶어진 무기력함에 집어 든 책이다. 벌써 꽤 오랜 시간 나는 무력했지만 스스로 원했다고 믿으며 끝까지 바득바득 학위과정을 마쳤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할 지금 나는 무너졌다. 사실 '이대로도 좋지 않을까, 그냥 적당하게 살아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텐데.'라는 마음에 주저앉은 지 수개월이다. 내가 원한 것의 마지막 관문, 그리고 다른 삶의 초입 즈음에 이르러 확신을 잃고 나아가지도 주저앉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다. 모든 걸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지금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은 제목에 골랐다. 그리고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죽고 싶었지만 죽음을 맞고 싶진 않았던 그녀, 베로니카


베로니카는 20대 초반의 아리따운 아가씨다. 부모님의 보호 아래 좋은 교육을 받고 도서관 사서라는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었으며 원하는 것이라면 수면제도 가져다주는 두 명의 남자친구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어쩐지 죽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빌레트(정신병원'에서 다시 살아났다, 이번에는 원치 않는 죽음과 함께. 한꺼번에 털어 넣은 수면제로 인해 심장에 큰 타격을 입었고 수일 내 그녀는 죽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선택한 그녀에게는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었고 그 며칠간 그녀의 삶은 큰 혼돈 속에 빠진다. 처음 그녀는 담담한 척한다. 그러다 <형제클럽>의 노인에게서 모욕을 당하고 수치심에 부르르 떨기도 하고, 제드카와 미친다는 것에 대해 심오한 토론을 나누기도 한다. 이후 마리아 그리고 에뒤아르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하기 시작한다.


표면상으로는 한 기자가 슬로베니아가 어딨는지 모른 채 모욕적인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자살했던 베로니카는 사실 현실과 현실을 지켜내기 위한 삶에 권태를 느껴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녀의 부모, 특히 어머니가 주었던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녀를 일정한 틀에 가두었고 그 틀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를 억누르고 속여가며 살아왔다. 그것을 자존심, 당차 보임이라는 허울로 포장해왔다. 이게 '정상'이라고 한다면 빌레트에서 틀을 깬다. 모두가 잠든 어느 날, 어린 시절 마음에 품었던 피아노를 마음껏 치며 이를 풀어냈고 멍한 눈으로 이를 지켜보던 에뒤아르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다. 또 이제는 미치지 않았지만 빌레트에 머무는 마리아가 그 모든 껍데기를 벗어버리기를 권한 그날 밤 스스로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을지에 도전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베로니카는 삶에 대한 의지를 발견했다. 누군가가 권하는 대로, 혹은 요구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미치는 방법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국 또 다른 틀을 깬 에뒤아르와 함께 그녀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현실과 미친다는 것


세상의 상식으로 유지되는 빌레트는 미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제드카는 광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베로니카와 처음 만난 날 그녀는 왕과 백성들의 이야기를 한다. 어진 왕이 다스리던 어느 왕국의 백성들이 미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들은 왕이 미쳤다며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왕이 선택한 방법은 함께 미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라는 평안을 찾았다. 결국 우리가 정상이라고 칭하는 것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으며 다수가 ‘정상’이라고 인정하는 것에 부합하도록 나와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기준이 된다. 이는 병원장인 이고르 박사가 말한 비트리올(아메르튐)라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비트리올이 많은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공포감으로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 이들은 외부에서의 위험을 차단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렇게 자신을 지켜나가지만 결국 이는 스스로를 옭아매고 자신을 가두는 일이 된다. 그렇게 스스로 한계를 명확히 하고 살아가는 것은 욕망과 의지를 앗아간다. 보통 사람처럼 일상은 영위할 수 있으되 많은 부분을 체념하게 되고 종국에는 빈껍데기가 된다. 어쩌면 정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적거나 체념한 사람들이 아닐까.


마리아나 에뒤아르 모두 각자의 두려움으로 미쳤지만 정상의 범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여전히 두렵기에 미친 상태로 모든 걸 발산할 수 있는 빌레트에 머문다. 그러나 베로니카가 죽음 앞에서 보여준 광기, 그 안에 담긴 강한 생의 의지가 이들을 바꾼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광기(비정상)와 의지(정상)는 대척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을 내몰아보고서야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정상과 비정상은 한 끗 차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극과 극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멀리 있으되 또 맞닿아 있다. 얇은 장막을 한 꺼풀 걷어내면 서로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베로니카에 공감했다. 지금 내가 힘든 것은 스스로 의지도 생기지 않고 욕망하지도 않으면서 그럴듯한 말과 행동으로 나 자신까지 속이고 있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진짜 내 알맹이는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얕은 수로 주변 사람들에게 대단한 의지로 열심히 사는 척하는 내 모습이, 그런 모습에 도취된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 나 자신을 폄하하는 건가 싶다가도 스스로의 깊이가 깊지 않음에 실망한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으니 베스트셀러로 남았겠지 하는 생각에 알량한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나뿐만은 아닐 거야 하는.


진짜 요즘 나는 나 자신과 싸우고 있다. 산 중턱 어딘가 평지에서 잠시 주저앉은 나와 오두막 침대 한 켠에서 창밖을 보며 무료하지만 평온함을 느끼는 나 사이의 싸움이다. 지난 몇 년 간 전자가 자잘한 번아웃에도 멱살 잡고 삶을 끌어왔다면 지금은 후자가 득세하고 있다. 이번엔 과연 누가 이길까.


아직 사람들과는 말이 통하는 걸 보니 미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정말 미치기 전에 나를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생의 의지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지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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