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살아가라
어느 날부터 허지웅이란 사람은 대중에게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마녀사냥>을 시작으로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면서였다. 나는 화면 속의 그가 껄끄러웠다. 확언에 가까운 그의 말은 아집으로 보였고 피식 웃으며 독설을 뱉는 그의 태도는 오만해 보였다. 방송에서 보여준 강박에 가까운 결벽증과 예민함은 부정적인 이미지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래서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여지없이 걸렀다.
그런 사람이 큰 병을 극복하고 돌아왔다. <나 혼자 산다> 속 그의 모습은 한결 보기 편했다. 이전과는 달리 날이 많이 무뎌진 느낌이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요가도 제법 열심히 하네? 그에 대한 인상이 조금은 달라졌다. 그래서 「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통해 만난 작가 허지웅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살고 싶다는 농담」은 악성림프종을 겪은 후 작가가 삶에 대해 생각한 것을 정리한 에세이다. 그는 세 장-'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삶의 바닥에서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다시 시작한다는 것'-에 걸쳐 삶이 주는 불행과 그에 대한 위로, 그리고 살아나갈 용기를 이야기한다. Reinhold Niebuhr의 기도문은 이 책을 관통하여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orm the other.
허지웅은 내가 본 대로 제법 껄끄러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과거의 자신을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목소리를 냈으며 태도는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묘사한 걸 보면. 그러나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 투병생활로 그의 시선과 태도는 달라진 듯 보인다. 특히 가장 어두웠던 '그 밤'은 긴 터널의 끝과 같던 순간이었다. 그 날이란 병마가 주는 고통이 삶의 의지를 꺾었던 날이다. '천장과 바닥'을 활용한 비유가 고통의 깊이를 묘사한다. 천장에 깔려 질식하기를 영원처럼 반복했고 바닥이 차갑게 느껴지는 순간들. 그래서 나을 것 같다는 희망도, 낫는다 해도 일상으로 돌아갈 가능성 모두 없다고 결론지었다. 죽기로 마음먹고 간단히 신변을 정리한 후 가진 약 모두를 삼켰다. 약기운으로 인해 깨다 잠들다를 반복하며 알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폭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힘겹게 화장실로 가 약을 게워내고 샤워를 한 후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안부 문자 한 통을 확인했다. 별 것 아닌 그 문자 한 통이 다시 그를 일상의 궤도에 올려놓았고 그는 다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말고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이야기를 건넨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아모르파티를 들어 거대한 운명이 주는 공포에 압도되어 그대로 삶을 이행하기보다 주체적으로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를 권한다. 긍정의 힘이나 가능성이 주는 막연한 희망을 믿어서가 아니다. 다들 그 정도는 아프다는 어쭙잖은 일반화를 시도하거나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둥 타인이 지고 있는 고통의 무게를 함부로 가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양태의 불행을 맞게 되고 그것이 가져오는 고통의 크기는 감히 논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불행에 설득당하여 자신을 긍휼히 여기거나 무력하게 앉아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담담하게 불행을 바라보고 정리하여 또 다른 불행이 오더라도 보다 쉬이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하자고 말한다.
중용(中庸)은 사서삼경 중 하나로 주자(朱子)에 의하면 ‘중은 치우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지지도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것의 이름이다. 용은 평상시 보통 때를 말한다.’고 한다. 좀 더 쉬이 풀어보면 본질을 지키면서도 가장 적절하고 평범하게 보이는 사고와 행동을 지켜가며 사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 연민이나 피해의식, 타인의 평가 등 내·외부적 요소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을 직시하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즉 어떠한 것에도 정도를 넘지 않는 여유(중)와 이를 꾸준히 행하는 담대함(용)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
지금의 내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스로 재생산해내는 고통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끝을 알 수 없는 위만 바라보며 나는 불행하다 생각했고 이 상황을 빠르게 타개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바꿀 수 없는 것, 이를테면 지나간 인연이나 선택,에 매몰되어 '만약에'를 되뇌며 고통에 치를 떨었고 그런 날들에는 꿈자리마저 사나웠다. 그러다 사소한 계기로 어둠이 물러가면 세상은 온통 장밋빛이었다. 그렇게 극과 극을 달려댔으니 너덜너덜해질 만도 했다.
몇 년째 뱉는 말이지만 중간도 찾고 중용도 찾아야지.
'힘내자!' 혹은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가벼운 말보다 위로가 되었다.
이전에는 누군가 힘들어하면 최대한 이해하려고 애써보며 장밋빛 위로를 건넸다. 가끔은 듣고파 하는 말을 추측하여 비위를 맞춰주려 애쓰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게 참 역해졌다. 내가 살아온 세계와 타인이 살아온 세계는 완전히 다른데 내가 어떻게 타인을 이해한다는 말을 뱉을 수 있는가. 이해라는 단어는 기만이다. 나는 평생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으며 타인 역시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위로나 공감도 마찬가지다. 내가 타인의 말이나 글, 행동을 내 방식대로 이해함으로써 발생하는 감정이지 결코 타인에 의해 주입될 수 없다. 긍정은 말할 것도 없다. 땅을 디딘 내 발 밑에 숨겨진 어둠의 깊이도 모르는데 감히 무엇을 호언장담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힘들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저 들어줄 수밖에 없고 위로조차 건네지 못하는 내가 변변찮게 느껴져 상대방에 미안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내게는 가볍지 않은 위로가 되었다.
내가 찾던 언어들, 나의 부서진 마음, 시작과 끝 중간에서 헤매던 많은 나날들을 찾았다.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동화가 아닌 지금 내게 필요한 것들을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나도 이런 느낌을 주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내 말이나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허지웅이라는 사람이 좋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지도, 싫지도 않다.
그래도 작가 허지웅이 건넨 말은 따듯했고 이야기가 비춘 그의 모습은 괜찮았다.
+)
많은 감정이 들었고 처음으로 글감을 정리했는데 오히려 글이 산만하다.
모두 제각각 강한 색채로 다른 감정을 담고 있기에 버무리기가 더 어렵다.
강의 노트처럼 정리해둔 글감 노트가 무색하게 누더기 같다.
쓰고 나니 무척 속상.
이래서 작가들이 수없이 퇴고하여 발행하는구나.
빠르게 반성해본다.